긴박한 상황.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골목길을 헤집으며 도망치는 중. 숨은 턱에 차오르고, 발은 납덩이라도 달아놓은 것마냥 무겁다. 뒤에서 쫓아오는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개똥을 피하려고 발을 넓게 벌려 펄쩍 뛰는 순간, 다리가 더이상 말을 듣지 않아,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온 발소리. 위기의 순간!

 

눈을 떴다. 꿈이었다. 요즘 계속 쫓기는 꿈을 꾼다. 최근에 찾아볼 이름이 있어서 들춰보다가 다시 읽게 된 책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때문일까. 이번에 새로 읽으면서 새삼 느낀 게, 당시 운동가들의 정신력이 정말 대단했다는 점이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비밀정보를 불지 않았던 여러 선배 운동가들이 정말 존경스럽다! 내가 만약 그 시대에 사회운동을 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고문은 시작도 하기 전에 다 불어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선배 운동가들에 비하면 겨우 용역깡패들이나, 전경들에게 조금 맞았다고 억울해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진다.

 

아직 모닝콜이 울리기 전이라 조금 더 누워서 뒤척이고 있는데, 큰 아이가 내 쪽으로 굴러와서 내 배에 머리를 박는다. 머리는 땀에 젖었는데, 손 발은 또 차다. 제 자리에 똑바로 눕혀주고 땀을 닦은 후, 이불을 배까지만 덮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눕는데, 잠시를 못 참고 발을 굴려 이불을 차내버린다. 다시한번 이불을 덮어주고나니, 이번엔 저쪽에서 둘째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조그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기는 벌써 잠이 깨서 혼자 놀고 있던 참이었던 것 같다. 손가락을 열심히 빨고(아니 정확히 말하자만 빨아보려고 애쓰고)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보며 '에', '앙' 등 글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짧은 소리를 주기적으로 내면서, 발을 열심히 동동 굴리고 있다. 잠시 내려다보니 녀석이 나를 알아본다. 눈동자가 나를 향하더니 동공이 열리는 듯,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어렴풋이 비쳐보인다.

 

녀석은 나를 알아보자마자 나를 향해 열렬히 손발을 움직여 버둥거린다. 안아달라는 표현일까.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니 곧바로 함박웃음을 짓는다. 요즘 느끼는 건데, 아기의 함박웃음만큼 대단한 건 없는 것 같다. 아무리 기분 나쁜일이 있어도 요 녀석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게 된다. 오늘따라 무슨 기분이 그리 좋은지 녀석은 평소에 잘 보여주지 않던 함박웃음을 두세번 연속으로 보여준다.

 

나도 기분이 좋아져서 잠시 녀석을 얼르며 놀았다.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은 게 틀림없다. 조그만 손짓 하나에도 녀석은 계속 웃음을 보이며 반응했다. 잠시 아기와 놀았으니, 이제 화장실에 가야겠다 싶어서 마지막으로 녀석의 뺨에 뽀뽀를 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코가 녀석의 배 근처를 스치는 순간, 냄새가 확 올라왔다. 응가를 쌌던 것이다!

 

그제서야 녀석이 왜 유난히 반가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응가를 싸놓고 빨리 치워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고,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갑자기 응가를 치워줄 사람이 나타나자, 반가움에 함박웃음을 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평소에는 한번 보여줄까 말까 한 것을 두세번 연속이나 보여주었던 걸 보면, 응가를 싸놓고 어지간히 기다렸던 모양이다.

 

기저귀를 다 갈아주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음을 싹 거둬버린 아기. 또 응가를 싸고나서 그 웃음을 다시 보여줄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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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