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다시 서울로 들어와서 특별한(!) 시민이 되긴 했지만 그 전까지 대략 3년 조금 넘는 시간동안 나는 경기도민이었다. 그렇지만 일터는 늘 경기도가 아닌 서울에 있었기에, 서울로 출퇴근을 해야 했다. 긴 시간을 지하철 속에 있다보니 뭔가 집중할 만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원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 틈에 꽉 끼어 있다보면 시선을 둘 곳도 마땅치 않고, 이런 저런 소음이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도 한다. 시계나 노선표를 보다보면 왜이리 시간은 더디게만 가는지. 왜이렇게 전동차는 느리게만 움직이는지 따위의 불평만 하게 되고, 눈을 유혹하는 온갖 광고판들은 시선을 두기에는 너무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생각한 것이 책이다. 내 출퇴근 시간은 책을 읽어도 될만큼 충분히 길기 때문에 시간 보내기에 딱이었다. 하지만 아예 사람이 많으면 책을 펼쳐 들고 있을 여유 따위 있을 리가 없다. 그런 날에는 어쩔수 없긴 하다.

다시 책 얘기로 넘어와서, 지하철에서 읽을 책은 뭐든 별로 상관이 없지만, 너무 재밌는 책이나 웃기는 책은 자제 하는 게 좋다! 예전에 이시백선생님의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를 읽다가 갑자기 터져나온 웃음을 참지 못해 주변 사람들에게 XX놈 취급 당한 기억이 있다.

내 생각에 지하철에서 읽기 가장 좋은 책은 잡지다. 크기와 두께 그리고 각 글의 호흡이 짧아서 언제든 꺼내 읽기에 좋다! 일단 내가 읽는 잡지들을 기준으로 보면, <작은책>이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는 딱 좋다! 크기도 작고, 무게도 가볍다! 다만 달마다 읽을거리의 편차가 조금 큰 편이라는게 흠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잡지 <녹색평론>도 지하철에서 주로 읽고 있다. 늘 읽을만한 내용들이 잔뜩 들어있어서 <녹색평론>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서는 날에는 발걸음마저 가벼워 진 느낌이다. <삶이 보이는 창> 역시 지하철에서 읽기에 딱 좋다! 글의 느낌이나 길이를 고려해봤을 때, 지하철에서 읽기에 이만한 잡지가 없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줄여서 <작아>)는 예전에 비해 크기가 커져서 갖고 다니기 조금 불편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주간지보다는 작기 때문에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오래전부터 작은 크기의 <작아>를 봐왔기 때문에 커진 판형의 <작아>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래서 유난히 크기에 민감한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작아>도 내 출퇴근길을 즐겁게 해주는 멋진 잡지임에 틀림없다! <창작과 비평>은 예전에는 열심히 들고 다니며 읽었는데, 최근에는 조금 시들해졌다. 일단 갖고 다니기 조금 무겁기도 하고, 지하철에서 읽기에는 글이 조금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점점 시간이 갈수록 <창비>는 내가 읽는 잡지 중에 가장 손이 안가는 잡지가 되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며칠 전에 내 손에 들어온 <g블로그>도 갖고 다니면서 읽기에 딱 좋다. 무려 인문 스트리트 매거진이란 부제가 붙었다. 멋진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어서 자주 방문하는 그린비 출판사에서 만들었다. 그리고 무료다! 블로그나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보내준다고 한다.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었지만, 그린비 식구들 생각보다 센스 짱이다! 게다가 다들 왜이렇게 글을 재밌게 잘 쓰는 것인지! 마구 샘솟는 질투심을 억누르느라 혼났다!

이제 출근시간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지하철 안에서 잡지 읽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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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이름

우리말 갈래사전을 사고
선생인 네 이모네 반 출석부를 몰래 훔쳐보며
특별한 이름보다는
모든 사람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이름
떵떵거리며 출세하는 이름보다는
메아리처럼
나즈막히 들리는 이름 어디 없을까
네가 평생 간직할 나의 첫 선물
네 얼굴만큼 선한
어디 그런 이름 없을까
벌써 며칠째
전화번호부를 뒤적이고
책방을 둘러보고


이한주 / 너희들 키만큼 내 마음도 자랐을까 / 삶이보이는창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평생 멍에처럼 달고 다녀야 하는 것만큼 부당한 것이 있을까?' 시인은 시를 소개한 바로 다음 페이지 첫 문장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공감할 수 있는 글이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래서 무척 중요하고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학교 다닐 때보면 이름으로 놀림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한동안 내 이름을 싫어했던 기억이 있다. 주변에서 특히 여성분들 중에서 '숙'자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분들이 이름에 대해 하소연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부모가 어떤 마음으로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평생 그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야 할 사람에게 이름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큰 고통도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생각해둔 이름이 있었다. 아내도 좋다고 서로 합의해 놓은 상태였다. 문제는 양쪽 집안 부모님들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한 쪽 집안 어른들은 불교 냄새가 강하게 난다고 노골적으로 싫다고 하셨고, 다른 쪽에서는 발음의 문제를 들어서 싫다고 하셨다. 나는 내 나름대로 최대한 어른들을 설득할 수 있도록 온갖 좋은 뜻을 다 갖다붙여서 아주 그럴듯한 해석을 곁들여 이 이름이 아주 좋은 이름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어른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뒤져서 순 우리말 이름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전화번호부를 들쳐보기도 하고, 작명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몇가지 새로운 이름들을 갖고 아내와 상의해보았으나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랜 시간을 새로운 이름을 짓는데 쏟아부었지만 별로 진전이 없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고 지냈다. 어느새 출생신고 마감기한인 한달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 이었다. 도중에 양쪽 어른들이 몇 개의 이름을 제안했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부했다. 마지막 순간 나는 어른들께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 그냥 원래 생각했던 이름으로 가겠다고 통보했다.

어른들은 마지못해 승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아이는 마침내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가끔 아이가 자라서 나를 원망하는 장면을 상상할 때가 있다. 왜 좀 더 예쁜 이름으로 지어주지 않았냐고, 친구들이 놀린다고, 좀 더 평범한 이름이었으면 좋겠다고 원망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아빠가 이 이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지었는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등을 차근차근 이야기해준다면 과연 이해해줄까? 어떨까?

요즘 어린 아기들을 볼 때마다 둘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그러면서 둘째 이름은 뭘로 지으면 좋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보기도 한다. 쓸데없는 공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Posted by 감은빛

돌담에 매달린 꽃

창 너머 돌담 틈서리에
꽃 한 송이 매달려 있네
며칠 전부터 피었을 텐데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피었을 텐데
오늘 처음 눈길 마주쳤네
여기 좀 봐 달라고
눈 좀 맞춰 달라고
손짓하고 있었으련만
이제껏 보고 싶은 것만 보아온
어리석은 두 눈이여
노란 꽃 이파리
위로 기어오르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리던 날
1000일째 돌담에 매달려 있는 꽃들이
생각났네, 공장에서 쫓겨난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
희망조차 섣부른 그 이름 앞에
위태로운 건
돌담이 아니라, 꽃이 아니라
닫힌 마음이었을레
눈길조차 건넬 줄 모르는
식어 버린 가슴이었을레

박일환 / 끊어진 현 / 삶이 보이는 창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복직하는 것이 평화~' 문정현 신부님의 글에 조약골이 곡을 붙인 '평화가 무엇이냐' 란 노래의 첫 구절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의 하나다. 조약골이 직접 부른 곡도 좋지만 실버라이닝이 편곡하여 흥겹게 바꾼 곡도 맘에 든다. 실버라이닝의 곡과 조약골과 평택에서 활동하던 여러 사람들이 함께 부른 곡은 예전에 소개한 적이 있다. (2008/09/02 - [노래와 추억] - 평화는 과연 무엇일까?),(2008/09/02 - [노래와 추억] - 평화는 우리 가슴 속에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난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사무직 직장인보다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고,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에서 더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당연히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노동법에 보장된 최소한의 권리를, 땀흘려 일한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요구하면 곧바로 불이익을 당하기 마련이다. 법은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알고 있었건만, 정작 불이익을 당했을 때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죽어라 일만 해주고 제대로 돈도 못받고 몇 달을 지난 경우가 있었다. 밀린 돈을 받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결국 받을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사장이란 작자에겐 얼마 되지도 않을 돈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엄청 큰 돈이었다. 결국 받지 못한 그 돈을 받기 위해 자존심이고, 인격이고 다 내팽겨치고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고 일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휴대전화 문자메세지로 해고 통보를 받은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은 철탑 위에서 고공농성도 해보고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단식농성도 해봤지만 끝내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지회는 이제 천 이백일 가까이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지만 회사와 국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어디 그들 뿐인가 작년, 재작년에 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랜드, 홈에버, 대우자동차, 기아자동차, 콜텍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불이익을 당한 사례는 정말 많다.

하나 하나의 사례를 볼 때마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나라는 존재가 참으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시인은 돌담에 매달린 꽃을 보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내용에 등장 한 것은 기륭의 여성노동자들이지만, 이 땅의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을 말하고 있다.

늘 낮은 곳을 향하고, 그늘진 곳을 향하는 시인의 시선이 잘 느껴지는 시이다. 무릇 시인이란 이런 존재여야 하지 않겠는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을 보고,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야 말고 시인의 숙명이 아닌가. 언젠가 내가 문학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면 지금의 이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감은빛


수화기 속의 여자


 어디서 잘라야 할지 난감합니다 두부처럼 쉽게 자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어딘지 서툰 당신의 말, 옛 동네 어귀를 거닐던 온순한 초식동물의 냄새가 나요
 내가 우수고객이라서 당신은 전화를 건다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수고객이었다가 수화기를 놓는 순간 아닌
 우린 서로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선생님, 듣고 계세요?'
 '......네'
 '이번 보험 상품으로 말씀드리면요'

 나와 처음 통화하는 당신은 그날 고개 숙이던 면접생이거나 언젠가 식당에서 혼이 나던 종업원이거나 취업신문을 열심히 뒤적이던 누이
 당신은 열심히 전화를 걸고 나는 열심히 전화를 끊어야겠지요 어떡하면 가장 안전하게, 서로가 힘 빠지지 않게 전화를 끊을 수 있을까요?
 눈만 뜨면 하루에게 쉼 없이 전화를 걸어야 하는 당신 죄송합니다
 지금 저 역시 좀처럼 대답 없는 세상과 통화중입니다 뚜뚜뚜뚜


이명윤 / 수화기 속의 여자 / 삶이 보이는 창

2006년 전태일문학상 수상작


 대학을 다닐때 여러차례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에 보태고 용돈으로 쓰곤 했는데, 나는 주위 친구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일들과는 좀 다른 일들을 많이 했다. 뭐 어찌 생각해보면 내 주위에 있던 친구들이 대부분 무난하고 평범한 아르바이트만 해서 내가 유난히 특이한 일만 한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일이지만 암튼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좀 다양한 일들을 겪어봤다고 생각하고 있다.

 쌀배달도 해보고(당시에 모 코메디 프로그램 피디를 쌀집아저씨라고 불렀는데, 어느 선배가 나만 보면 웃으면서 쌀집 아저씨라고 놀리던 기억이 난다!), 식육점에서 일해보기도 하고(맛있는 고기를 직접 골라서 구워먹으면 진짜 행복했다!),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은 당연히 해봤고, 까페 서빙도 잠깐 해봤다. 학원 강사를 좀 오래했고, 막노동도 제법 해봤다. 공장에 들어가서 일해보고 싶었는데, 그건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못 해봤다. 대기업 유통회사에서 통행량조사나 상가현황조사 매장판매량조사 등등을 해보기도 했다. 여행길에 우연히 입찰대리인으로 몇십분 해주고 몇만원을 여행경비로 보탠 기억도 있다.

 가장 스릴넘치고 긴장감을 느끼는 일은 짧은 시간안에 한번도 본적 없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파는 일이다. 주유소에서 자동차용 세제나 광택제 등을 파는 일을 했는데, 이게 운이 좋으면 돈을 좀 만질 수 있었다. 차가 들어와서 기름을 넣는 짧은 시간동안 최대한 차주의 관심을 유발시켜서 구매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운이 좋으면 하루에 몇 십개도 팔 수 있었다. 이건 바로 얼굴을 보면서 하는 일이라서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또 한가지 짧은 시간안에 고객의 흥미를 끌어서 상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 있다. 요건 얼굴을 보지 못하고 목소리만 들으면서 일을 하는데 바로 텔레마케팅이다. 주로 여성분들이 많이 하시는데, 나도 한 두어달 해봤다. 학습지를 파는 일이었다. 당시에 나는 설마 전화로 이 비싼 학습지를 팔수 있을까 의심을 갖고 일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간단하게 팔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구체적인 전략으로 아이들을 공략하는 방법과 부모를 공략하는 방법이 있는데, 나는 주로 아이를 공략하는 방법이 재밌도 더 맞는 듯 했다. 아이를 공략하는 방법은 일이 잘 진행이 되다가도 직접 경제력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에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일이 많다.

 아뭏튼 그때 나는 하루종일 좁은 공간에 갖혀서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전화를 돌려야 했다. 평소 무뚝뚝한 내가 수화기를 붙들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내가면서 온갖 비위를 다 맞추고 얼르고 달래서 학습지를 팔아야 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아이에게 온갖 친한척을 다하면서 아이들 말투를 흉내내기도 했고, 역시 낯선 아저씨에게도 사소한 몇가지를 물고 늘어지면서 흥미를 끌도록 만들었다.


이 시를 읽다보면 좁아터진 곳에 따닥따닥 붙어 앉아서 하루종일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던 날들이 생각난다. 나는 나중에 학원에서 학부모 상담을 할 때나, 단체에서 회원사업을 할 때, 그리고 지금도 두어달에 한번씩 일이백명과 전화통화를 할 일이 생기곤 했는데,  이때 텔레마케팅을 했던 것이 경험이 되어 자신있게 전화작업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한때는 내가 말을 잘 하는 편이라고 어처구니없는 믿음을 갖고 살았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런 잘못된 기억은 이 텔레마케팅을 하면서 갖게 되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Posted by 감은빛

오월햇살


네 엄마를 분만실로 들여보내고
문밖에서
겁 많은 네 엄마의 불안을 주워 담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네가
노래 못 부르는 것은 나를 닮지 말고
뽀얀 속살은 네 엄마를 닮았으면 하다가도
저어기
네 엄마의 신음소리가 들릴때면
여자이기보다는 남자이기보다는
예쁘다기보다는 선하다기보다는
그저 너와 네 엄마가 건강하기를
햇살처럼
들풀처럼 건강하기를
병원 복도를 동동거리는 동안
창 밖엔
오월 햇살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한주 / 너희들 키만큼 내 마음도 자랐을까 / 삶이 보이는 창


 
 할일이 있어서 컴퓨터를 켰다가 일은 안하고 인터넷만 돌아다녔다. 어느새 자정을 지나 날짜가 바뀌었다. 오늘은 아내가 열시간이 넘는 진통 후에 아이를 낳은 날이다. 즉 우리 아이의 생일이다! 아마도 예정일이 지났던 것 같다. 아내는 거짓말처럼 예정일에 진통을 느낀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그건 '가진통'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진통이 오기 전 단계였다. 가진통으로부터 대략 이틀(아마도 워낙 정신이 없을때였기에 그런지 정확한 시간이 기억이 안난다!)쯤 지나서 진짜 진통이 왔다. 아내와 나는 여러차례 병원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다가, 아내가 이젠 가야한다고 확신하자 대충 짐을 싸들고 병원을 향했다.

 마침 당시 우리 동네에 아기와 산모를 위해 작은부분까지도 신경을 많이 써주기로 유명한 병원이 있었다. 나야 그런 것 하나도 모르지만, 아내는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그 병원이 곧 태어날 우리 아이를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병원까지 보통 사람 걸음으로 걸어서 대략 20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택시를 탈까 고민하다가 그냥 천천히 걸어서 갔다. 아내는 걷는 게 자연분만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다. 걸어가면서 우리는 유명한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10월의 마지막 날'에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다고 얘기하며 웃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아내가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 장모님과 아내의 절친한 친구가 달려왔다. 진통이 심해지자 아내는 소리를 질러대며 내 손을, 팔을 그리고 내 머리칼(딱 한번)을 쥐어뜯었다. 다른 사람들은 임신하면 미리 무슨무슨 호흡법 등등을 배운다고 하던데, 아내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진통이 오면 그냥 소리를 질러대고 이를 앙다물고 그 고통에 맞섰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던지 병원이 떠나갈 지경이었다. 나와 아내의 친구는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애썼지만 아내는 홀로 죽을만큼 아프다는 고통을 이겨나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아, 그 기분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집에서 처음 진통을 느낀 지 열시간이 넘어섰다. 아내는 점점 더 빨라지는 진통에 죽을 듯이 괴로워했다. 여전히 소리를 질러대는데, 그제서야 간호원 한 명이 들어오더니, 소리를 지르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호흡법을 알려주고, 어디에 어떤 느낌으로 힘을 줘야 하는지도 알려줬다. 진통은 오래했지만 요령이 없어서 아직 자궁이 하나도 안열렸다고 했다. 간호원은 언젠가 영화에서 본 듯한 호흡법을 알려주며 '아빠'가 함께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점점 더 진통은 빨라졌고, 아내와 나와 아내의 친구는 아주 열심히 간호원이 알려준 호흡법을 따라했다. 아내는 여전히 아프긴하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나아진 모습으로 호흡법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다시 간호원이 오더니 곧 분만이 시작될 것 같다고 분만실로 옮겼다. TV나 책에서 보면 분만할 때 남자는 밖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초조해하면서 기다리던데, 나는 분만실에 함께 들어갔다. 이 병원은 남편이 곁에 있도록 하는 방침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은 아내를 격려하기도 하고, 요령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정신없는 내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 나는 아내와 아이가 별 탈이 없기만을 바라고 또 바랬다. 거의 다 되었다고 조금만 더 힘을 주라고 의사 선생님이 재촉하고 격려하기를 여러차례. 마침내 아이가 이 세상으로 나왔다.

의사 선생님과 간호원은 아이가 나오자 아빠가 탯줄을 자르라고 했다. 워낙 긴장하고 있던 터라 뭘 어찌해야할지 몰라서 허둥대는데, 간호원이 시키는대로 움직여서 간신히 탯줄을 잘랐다. 간호원은 아이를 깨끗한 천으로 감싸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아이는 쭈글쭈글한 모습으로 맹렬하게 울고 있었다. 잠시 아이를 간단히 씻겨서 깨끗한 배냇저고리에 감싸서 엄마에게 안겨줬다. 아내는 아이를 안고서 눈물을 흘렸다. 나 역시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냈다.

 삼일 동안 아내와 나와 아이는 병실에 있었다. 다른 아빠들은 아이가 태어난 날과 다음날 정도만 쉴 수 있었다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나는 한 달동안 육아 휴가를 받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는 잠을 자거나 젖을 빨거나 울거나 했다. 한 밤중에 깨서 울면 아내는 젖을 물렸고, 젖을 다 먹은 아이를 잠시 바람을 쐬주기 위해 내가 안고 나와서 병원 복도를 거닐었다.

 작고 여린 생명을 안고서 나는 어쩜 이리도 작을까 신기해하고 또 신기해했다. 아이에게 뱃속에서 목소리로만 들었던 아빠를 실제로 만난 소감을 물어보기도 하고, 어서 무럭무럭 자라서 아빠랑 함께 등산도 가고, 축구도 하고, 여행도 가자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리고 좀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말도 안되는 곳에 태어나게해서 미안하다고, 네가 크면 아빠와 함께 좋은 세상 만드는 일을 함께 하자고 얘기해주기도 했다.

 지금도 팔에 그리고 가슴에 그 조그만 아이를 안았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다!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이자, 아이의 생일이다. 아이를 위해서도 축하해야 할 날이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아내를 위해 꼭 기념해야 할 날이다! 마침 금요일이다! 일중독에서 하루쯤은 벗어나서 뭔가를 해줘야겠다!





Posted by 감은빛

아직은 저항의 나이


눈꽃
너는 피어라 나는 네 안에 지마
그래도 울지 않으리
이마 위에 아이 눈썹 만한 눈이파리
예수가 죽어 간 나이
시인이 요절한 나이
초월하지도 못했네 순응하지도 않았네
아 아직은 저항의 나이
내가 쓴 길도 내가 지운 길도
덮고야 마는 단호한 눈발이여
앞선 발자국 하나 없이 내 흔적을 남겨서
당신에게 가야하네
눈꽃 피는데, 당신에게 닿기도 전에
눈꽃만 피는데,
우두둑 솔가지 부러지고
나는 먹먹한 눈물 한 방울로
길을 녹이네


문동만 / 아직은 저항의 나이 <일과시> 동인 7집 / 삶이 보이는 창




한때 운동권이었거나 진보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선배들을 보면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대체 몇 살이 되면 더이상 진보적이지 않게(보수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많은 선배들이 나도 한때는 운동권이었느니 하고 썰을 풀지만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한숨만 나온다. 그런 모습으로 내게 큰소리치는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럽지도 않을까? 저 나이가 되면 그런 부끄러움마저도 느끼지 못할 만큼 사람이 무뎌지는 것일까? 진보는 날카로움이라고 했건만 나이를 먹어가면 무뎌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궁금증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나도 저 나이가 되면 똑같은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인가? 글쎄 어떨까? 나이가 많이 들어도 멋지게 살고 계신 선배님들도 많다! 그러나 그렇게 멋지게 살지 못하는 선배들이 사실은 훨씬 더 많다! 나는 어디에 속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면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지만 나는 가끔 혹 어느 후배에게 한심한 선배가 되어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할 때가 있다. 나는 아직 한창 어릴때(그저 사회에 대한 불신과 젊은 열정만으로 똘똘 뭉쳐진 말썽덩어리였을 때) 선배들 욕을 참 많이 했다. 그땐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선배들 모습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죄다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서 싫어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자연스레 운동을 접는 선배를 보면 그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운동을 접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길을 가는 것을 용서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 다른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혹은 가고 싶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길이 아주 어긋난 길이 아니라면 박수를 보내줄 수도 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욕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간혹 아주 어긋난 길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미안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나는 지금 어느 길을 가고 있을까? 나는 아직 처음 그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과연 지난 날의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어느 후배가 보기에도 내가 여전히 그 길을 가고 있을까? 글쎄 나이를 먹을 수록 이런 것들에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다.

가끔 내 나이가 29에서 영원히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동료 강사는 나이가 마흔쯤 되었는데, 절대 자신의 나이를 밝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누가 나이를 물으면 늘 29이라고 대답한다. 그 다음해에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자신은 영원히 29이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20대의 치기어린 열정과 에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좋다! 세상에 대해 한껏 날을 세운 당찬 기백이 좋다! 좌충우돌 여기저기 부딪히고 찢기어 상처입은 순수함이 좋다! 뭐하나 거리낄 것 없이 마음가는 대로 살아가는 자유가 좋다!

서른을 넘어 마흔을 바라보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어야 아직은 저항의 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끝도없는 선문답이 이어진다.

더도 덜도 말고 문동만 선배처럼 나이를 먹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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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봉은사 개조심


봉은사 다들 아시죠
신라 때 연회스님이 견성사란 이름으로
처음 창건하였다는 봉은사
흔히들 이런 절을 천년고찰이라고 부릅니다
연회스님은 신라의 고승으로
늘 법화경을 읽고 보현관행을 수행하였는데
정원 연못에 연꽃이 피어 항상 시들지 않았다고 하지요
이렇게 유서 깊은 절이
삼성동 73번지 큰 길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뭇 중생들 곁으로 아주 가까이
다가서 있는 것이지요
그 봉은사 경비실 담벼락에
개 만지다 물리면 책임지지 않습니다
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고승의 화두 같기도 하고
선방 스님의 선문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대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라
쓸데없이 개를 만지려다 물린 사람과
책임지지 않겠다는 절간의 경비들이
고만고만하게 모여서
한바탕 재밌는 일이 벌어질 만도 한데
일이 커지면
도량 넓은 스님들이 발뺌이야 하겠습니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개한테 물리면 아프니까
봉은사에서 책임져준다고 해도 만지지 말아야지요


임희구 / 삶과 문학 / 삶이 보이는 창




 멋진백작님의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강남 삼성동 봉은사에 걸린 바른말 현수막'  이란 글을 봤다. 잠깐 봉은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절 이름인데, 어디서 들었을까? 분명히 최근에 봉은사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근데 강남이라 그쪽 동네는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곳으로 평생 인연을 맺기 어려운 동네인데, 그렇다면 내가 알 수가 없는데, 왜 이렇게 이름이 익숙한 것일까?

 한참동안 고민을 했다. 결국 생각이 안나서 그냥 포기하고 일을 했다. 요즘 계속된 야근에 몸이 많이 망가졌다. 감기몸살기운도 있는데, 오늘 안에 정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도 못자고 오늘도 벌써 새벽 3시를 훌쩍 넘겨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다.

 서둘러 책장을 뒤졌다. [삶과 문학]을 꺼내들었다. 책장을 스르르 넘기다가 찾아냈다. 임희구 시인이 쓴 '봉은사 개조심'이란 시를 펼쳐들었다. 지난 6월에 있었던 [삶과 문학] 출판기념회에서 임희구 시인이 직접 낭독하는 이 시를 들었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 그 장소가 좀 소란스러웠고, 시인은 마이크도 없이 그냥 육성으로 낭독했기에 잘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책을 찾아보고 시가 좀 특이하다고 느꼈다. 좀 재밌다고 생각되긴 했지만 곧 이 시를 통해 시인이 전하고 싶은 목소리는 무얼까 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글쎄, 삼성동에 봉은사라는 천년고찰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테고, 그냥 개를 만지려다 물리면 책임지지 않는다는 팻말이 재밌어서 즉흥적으로 지은 것은 아닐까? 쉽게 추측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그러나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다.

 요즘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을 경찰이 강제로 검문한 이후로 불교계 전체가 대대적인 반정부투쟁에 나서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금 명박이와 어청수가 하는 짓거리를 보면 아무리 도량이 넓은 스님들이라도 도저히 참기 어려울 것 같다! 아니 정말 민중을 위해 애쓰시는 스님이라면 마땅히 이 어이없는 정권에 맞서야 하는게 당연할 듯 싶다!

 나는 종교가 없기에 특별히 불교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하진 않지만, 새만금 삼보일배를 진행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셨던 수경스님과 생명평화탁발순례를 오랫동안 해오신 도법스님, 그리고 금정산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문제로 오랫동안 여러차례 단식을 하셨던 지율스님 등 많은 훌륭한 스님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알게모르게 깨달은 바가 있어 불교를 조금은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이명박이라는 천박한 인간이 옛날에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을 때, 참 황당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떻게 한 나라의 수도를 책임지는 시장이라는 작자가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때 나는 서울시민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명박이가 아직도 시장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청계천을 파헤쳐서 오랫동안 그 지역에 계셨던 분들을 쫓아내고 있을 때 잠깐 서울시민이었던 적이 있다. 그때 명박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혼자 기분나빠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나는 명박이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인가?

 명박이가 대통령선거에 나온다고 했을 때, 나는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렇게 천박한 인간이 설마 대통령이 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 설마가 진짜 이루어졌고, 그래서 전 국민이 광우병 쇠고기를 먹어야 하고, 의료와 수도 등 공공부문 민영화 때문에 걱정해야 하고, 잘못된 교육정책으로 모든 학생들이 괴로워해야 했다. 선량한 시민들은 볼순세력이니 폭도니 하는 말들로 매도되어야 했고, 경찰의 방패에 맞아 피흘리고, 군홧발로 밟히고, 연행되어 48시간동안 자유를 구속당하고 100만원에서 400만원 사이의 벌금까지 내게 되었다. 도로와 인도를 모두 막아 통행권 및 이동권을 침해하고 심지어 횡단보도까지 막아놓고도 지들이 저지른 짓이 불법인지 모르는 경찰이 미성년자를 폭행하고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인도에 가만히 서있는 사람들까지도 무조건 잡아 넣고는 적립금인지 마일리지인지를 챙겨가는 등 무슨 게임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 경찰이란 이름의 폭력집단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 또 얼마전에는 젖어버린 얇은 티셔츠 하나만 걸친 여성에게 강제로 브래지어를 벗긴 일이 밝혀져서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하는데, 경찰이 브래지어도 흉기가 될수 있다고 짖었다고 한다. 왜 팬티도 마저 벗기지 그랬니? 이러고도 국민의 세금을 받아 처먹고 있으니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먹고사는 놈들이 나를 두들겨패고 잡아가둬도 찍소리 하나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참 어처구니 없는 세상이 되었다.

 아,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열만 받고 기분만 나빠진다. 일이고 뭐고 다 관두고 잠이나 자야겠다. 비가 온다. 창문으로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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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비에서


 육탈한 말이 햇살아래 누워있다.
 얼마나 먼 길을 헤매야 저렇게
 제 육신조차 벗어버릴 수 있을까?


 눈 높이에 떠 있는 구름, 마른 풀 위에 닿을 듯 나는 새들
 야생의 낙타들이 순례자처럼
 깃들 곳을 찾아 가고 있다.


 길은 어디에 있을까? 사방으로 누운 풀들이
 누군가 지나간 흔적처럼 남아 있을 뿐
 무한 천공의 벌판에 나는 길 잃은 낙타 한 마리로 떠돌고 있다.


 낮은 구릉 아래 숨어 있는 겔에서는 어린 날 사진 속의 내 누님 같은 아낙네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연신 아이락을 따라주며 벌판 끝을 바라보던 그 아낙, 집 떠난 낙타를 찾아 칠백 리가 넘는 물가로 갔다는 남자를 기다리며 들꽃처럼 곱게 늙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함께 있으면 칠백 리도 지척이라는 뜻일까?


 밤이 와 불빛 하나 없는 고비에 등불 대신 별이 켜진다.
 구름 높이에서 빛나는 별, 큰 붓으로 그려낸 듯 중천에 가로누운 은하수
 야생의 낙타처럼 고비에 둥둥 떠
 나는, 흘러간다.


 별은 구름이 되고, 구름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풀이 되고,
 풀은 끝내 저 혼자 흘러 흔적이 된다.


 최성수 / 천 년 전 같은 하루 / 삶이 보이는 창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 본 외국은 몽골이었다. 제대하고 복학하고나서 과 학회중 하나의 회장을 맡게 되었을 때였다. 학회 지도교수이기도 했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이기도 했던 차교수님의 소개로 한국휴먼네트워크라는 단체가 일본의 요코하마 시립대학교 정책 엔지오라는 시민단체와 함께 몽골 고비 사막에 나무를 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막화를 막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두 단체는 매년 참가자들을 모아서 몽골로 생태투어를 떠나는데, 교수님께서 우리 학회의 학생들에게 참여를 제안했다. 약 백만원쯤이었던 참가비가 부담스러웠는데,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참가비의 절반을 여러 선배님들께 후원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물론 그냥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투어에 다녀온 후에 성과물을 만들어 후원해주신 선배님들께 보내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아마도 내 예상이지만 선배님들께 모은 돈만으로는 분명히 모자랐을테니,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제법 큰 돈을 보태지 않았을까 싶다!

 암튼 그렇게 몽골에 다녀올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대략 삼사십명의 대학생들이 참여한다고 들었다. 우리 학회에서는 나를 포함하여 네 명만이 참여하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몇 명이 더 있었지만 준비과정에서 사정이 생겨서 다 빠지고 네 명만이 몽골에 가게 되었다. 투어를 진행하는 단체측 담당자가 우리나라에서 참여하는 대학생은 아마도 우리외에는 없을거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학생대표로서 일본 학생대표와 상의하여 여러가지 행사 준비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사실 말이 부탁이지 강제나 다름없었다. 나는 거절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몇 안되는 후배들을 데리고 준비를 해야했다.

 투어 일정에는 한일몽 문화교류행사의 날이 정해져 있었는데, 이 날의 행사 전체를 일본 학생들과 우리나라 학생들이 함께 준비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본 학생들은 우리의 열배 가까이 되었고, 우리보다 훨씬 일찍부터 준비해오고 있었다. 나는 짧은 영어로(일본어를 전혀 못하기에 그나마 영어로 소통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학생대표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행사 진행을 의논했다. 나중에는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그 단체에서 일한다는 학교 선배의 도움도 받게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짧은 기간동안 준비를 마칠 수 있었고, 우린 몽골에 가서 문화교류의 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룰 수 있었다.

 투어의 절정은 당연히 고비사막의 방문이었다. 울란바토르에서 거의 하루종일 차를 달려서 저녁때가 되어서야 고비사막의 입구라는 바양고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어느새 친해진 일본 학생들 몇 명과 함께 고비사막에 들어가봤다. 혹시 길을 잃을지도 몰라서 멀리까지 가지는 못했고 그냥 잠시 들어가서 사막을 감상하고 나왔다.

 무수히 피어오르는 모래먼지를 참아내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을 견뎌내고, 에어컨이 없는 낡은 버스 안에서 찜통같은 여름의 폭염을 견뎌내면서 하루종일 초원을 달려와서 도착한 사막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초원을 지나오면서 가끔 뼈만 남아서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한때는 이 초원을 누비고 다녔을 어느 야생동물을 만나기도 했다.(말이나 소였을 거라고 예상된다.) 만약 무슨 일이 생겨서 우리가 여기에 낙오된다면 우리도 저렇게 희디 흰 뼈로만 남게 되겠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 여름의 사막은 낮엔 뜨겁디 뜨겁지만, 밤이 되면 이가 덜덜 부딪힐 만큼 춥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버린다고 들었다. 일본 학생들은 미리 대비해서 모포, 침낭, 얇은 이불 등을 각자 준비해왔다. 나는 아무생각없이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그들을 따라나섰는데, 덕분에 사막에 서 있는 동안 덜덜 떨면서 추위와 싸워야 했다.

 한참을 떨고 있을 때, 어느 일본 여학생이 나를 발견하고 자신이 걸치고 있던 모포를 함께 걸치자고 제안했다. 처음엔 자존심때문에 거절했으나 한번 더 제안했을 때 못 이기는 척 모포속으로 들어갔다. 맹세컨데 야릇한 감정따위는 없었다. 그런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영하의 기온에서 반바지와 반팔 차림으로 오랫동안(시계가 없어서 얼마나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버티면서 온 몸이 꽁꽁 얼어붙을만한 상황이었다.

 그 얇은 한 장의 모포가 전해준 작은 온기가 나를 살렸다. 몸이 조금 녹고 난 후, 그제서야 비로소 어두운 사막을 제대로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크지 않은 모포를 나와 함께 걸치고 있느라 불편했을 그 여학생은 요코하마 시립대학교 1학년이라고 했는데, 영어를 제법 잘 했다. 일본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발음도 괜찮았다. 밤이 늦어지면서 학생들이 하나 둘 숙소인 겔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함께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고비사막을 경험했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막을 밟아본 것이다. 창백한 달빛 아래 새하얀 모래가 끝없이 시야에 닿는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동안 눈을 감고 서있었다. 마치 내가 시인이 된 양 우쭐해졌다. 그러나 눈을 뜨면 모래로만 채워진 거대한 순백의 공간 속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또 작아지고 있었다.

 시를 읽는 내내 눈에서는 달빛 아래 펼쳐진 고비 사막의 황량한 풍경이 다시 펼쳐지고, 귀로는 하루종일 초원을 달려왔던 낡은 버스의 시끄러운 엔진소리가 다시 들렸으며, 코로는 시큼털털한 아이락(마유주)의 향을 다시 맡아고, 입으로는 텁텁한 모래먼지가 다시 씹혔다. 그리고 드넓은 초원과 사막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던 바람이 내 가슴속으로 불어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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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외상일기


셋방 부엌창 열고
샷시문 때리는 빗소리 듣다
아욱, 아욱국이 먹고 싶어
슈퍼집 외상장부 위에
또 하루치의 일기를 쓴다
오늘은 오백원어치의 아욱과
천원어치 갱조개
매운 매운 삼백원어치의 마늘맛이었다고
쓴다. 서러운 날이면
혼자라도 한 솥 가득 밥을 짓고
외로운 날이면 꾹꾹 누른
한 양푼의 돼지고기를 볶는다고 쓴다
시다 덕기가 신라면 두 개라고 써 둔
뒷장에 쓰고, 바름이 아빠
소주 한 병에 참치캔 하나라고 쓴
앞장에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고는 쓰지 못하고
해방 평등이라고는 쓰지 못하고
피골이 상접한 하루살이 날파리가 말라붙어 있는
슈퍼집 외상장부 위에
쓰린 가슴 위에
쓰고 또 쓴다
눈물국에 아욱향
갱조개에 파뿌리
씀벅 나간 손 끝
배어나온 따뜻한 피 위에
꾸물꾸물
쓰고 또 쓴다


송경동 / 꿀잠 / 삶이 보이는 창




  지금은 동네 슈퍼에 가도 외상장부를 볼 수 없지만(혹 아직도 외상장부를 사용하는 가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보지 못했다!) 내가 어릴때에는 동네 슈퍼 가게에 외상장부가 있었다. 날려쓴 글씨로 날짜와 이름 금액이 잔뜩 적혀있는 외상장부는 동네에서 장사하는 작은 슈퍼집에는 필수품이었다.

 가끔 엄마가 장보다가 빠뜨린 찬거리가 있으면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동네 슈퍼에 가서 외상으로 좀 받아오라고 했다. 슈퍼에선 아줌마가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외상이라는 말에 한번 눈살을 찡그리고는 외상장부를 꺼내 이름과 금액을 갈겨쓴다. 그러면 나는 무슨 죄지은 사람 마냥 기가 죽어 고개를 숙인 채 가게를 나오곤 했다.

 매일 외상 심부름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가끔은 오백원짜리 동전을 쥐어주고 2백원어치 두부를 사오라거나 백원어치 콩나물을 사오라고 하는 날도 있었다. 가끔은 말이다! 그런 날은 거스름돈으로 외상을 제하게 된다. 아줌마는 외상이 얼마 남았다고 엄마에게 말하라고 입을 크게 벌려 말하곤 했다. 그렇게 줄었던 외상은 다음에 심부름 가보면 다시 또 늘어나있었다. 나중에 이사를 가면서 그 동네를 떠날 때, 엄마가 그 슈퍼집 외상은 다 갚았을까 궁금해했던 기억이 난다.

 송경동 시인은 예전에 있던 단체에서 자주 마주치면서 알게 되었다. 그땐 인사도 미처 나누지 못했고 그냥 지나치며 얼굴만 익혔다. 나중에 허세욱 열사 추모제에서 추모시를 낭송하는 시인을 보게 되었다. 그때 그의 시를 처음 알게 되었다. '별나라로 가신 택시운전사께’라는 제목의 추모시를 낭송하는 그의 모습은 멋있었다. 힘있고 당당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거리에서 시를 낭송하는 시인. 언제나 투쟁하는 현장에서 함께하는 시인. 그의 부지런함과 헌신적인 모습이 사람들의 머리속에 그를 새겨놓았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의 아름답지만 아픈 시들이 그를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그는 무척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적어도 이쪽 바닥에서는) 앞으로 더 유명해질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계속 거리에서 그의 시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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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사랑


며칠째 목에 걸려 있는 가시
가만있으면
아무렇지 않다가도
침을 삼킬 때마다 찔러대는 가시
손가락을 넣으면
닿을 듯 말 듯
더 깊이 숨어버리는


잊는다 잊는다 하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견딜 만큼 아픈,
당신


고영서 / 기린 울음 / 삶이 보이는 창



 사람을 향한 사람이나 세상을 향한 사랑이나 모두 아픔을 참아내어야 비로소 그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부분의 '견딜 만큼 아픈, 당신'이란 구절이 그래서 내내 가슴 한 구석에 남는다. 나는 사랑은 그냥 행복한 것인줄 알았다. 그를 혹은 그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뭔가 막 힘이 솟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몇번의 연애를 겪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랑이 그저 기분좋은 설레임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첫 만남의 설레임과 서로를 향한 그리움과 서로를 견뎌내는 인내심이 모두 다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혼 후 내게 사랑은 딱 견딜만큼만 아프고, 견딜만큼만 힘든 끝없는 시련(혹은 전투)였다. 이 시를 읽고 사랑은 목에 걸린 가시라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뭔가 거북하고 불편하지만 어쩔때는 그리 신경쓰이지 않아 쉽게 잊어버리고, 그러나 잊을만하면 아픔을 상기시키며 계속 내 목에 걸려있는 가시. 사랑에 대한 완벽한 정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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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하늘공장

저 맑은 하늘에 공장 하나 세워야겠다
따뜻한 밥솥처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곳
무럭무럭 아이들이 자라고 웃음방울 영그는 곳
그곳에서 연기나는 굴뚝도 없애고 철탑도 없애고
손과 발을 잡아먹는 기계 옆에 순한 양을 놓아 먹이고
고공농성의 눈물마저 새의 날갯짓에 실어 보내야겠다
저 펄럭이는 것들, 나뒹구는 것들, 피 흐르는 것들
하늘공장에서는 구름다리 위에 무지개로 필 것이다
삶은 고통일지라, 죽어도 추억이 되지 못하는 고통을
하늘공장의 예배당에서는 찬양하지 않을 것이다
힘없이 잘린 모가지를 껴안고 천천히 해찰하며
내일이라도 당장 하늘공장으로 출근을 해야겠다
큰 공장 작은 공장 모두 하나의 문으로 통하는
하늘공장에 가서, 저 푸르른 하늘공장에 가서
부러진 손과 발을 쓰다듬고 즐겁게 일해야겠다
땀내 나는 향기를 칠하고 하늘공장에서 퇴근하는 길
지상에 놓인 집 한채가 어찌 멀다고 이르랴


임성용 / 하늘공장 / 삶이 보이는 창


 임성용 시인의 해맑은 웃음이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참 부드럽고 편안한 분이었다. 여러차례 만나뵈었지만, 늘 그 웃음을 웃고 계셨다. 촛불집회에서 그리고 어느 모임 뒷풀이 자리에서도 그와 함께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웃음 외에 다른 표정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솔직하고 재밌다. 그의 산문을 먼저 읽어서 보통 글솜씨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심각한 시를 이렇게 맛깔나게 쓰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의 시는 겉으로는 재밌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읽는 이를 괴롭힌다! 현실이 어떤지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는 읽는 이를 불편하게 하기 마련이다.

 50일이 넘게 단식중인 기륭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경찰은 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나타났다가 기륭 대책위의 격한 항의에 일단 그냥 돌아갔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정권이 하는 짓거리들을 보면 언제 다시 강제로 영장을 집행하려 들지 모른다. 이미 오랫동안 투쟁해왔고 거기에 단식을 시작한지도 오래되었으니, 그 분들의 몸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일지 상상이 안 될 지경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머리와 가슴을 가진 것들일까 궁금하다!

 답답한 마음에 이 책을 펼쳐들고 읽는다. 임성용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내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듯 한 기분이 든다. 예의 그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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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