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문학사'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08.12.17 시간이 멈춰버린 세계 (4)
  2. 2008.10.24 겨울 바다로 가고 싶다! (7)
  3. 2008.08.12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어 본 적 있는가?
  4. 2008.08.09 낮밥과 점심
  5. 2008.07.31 콩, 너도 죽었구나
  6. 2008.07.30 시를 향한 마음 (2)

지구의 시간

날이 밝아 몇 신가 보려는데 시계가 죽었다.
해가 떴으니 시간이 꽤 되었으려니
배추밭에 나가본다.
며칠 전부터 칡을 먹으러 내려온 산토끼들이
어린 호박잎을 밟고 밭에 들어가
애기배추를 갉아먹는다.
드문드문 갉아먹힌 애기배추의 그루터기가
아이들 얼굴에 난 생채기 같아 속이 상한다.
올가미를 놓아버릴까?
어린 호박잎들이 밟혀 찢겨진 자리에 서서
배추밭을 건너다본다.
이곳이 칡밭에서 배추밭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모양이다.
아니, 앞발을 들고 일어서서
괜찮을까 코를 벌름거려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망을 보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마리가 그러는지 어린 호박 줄기가 온통 뭉그러져 있다.
해가 꽤 높이 솟아 가게에
토끼 퇴치법을 물어보러 가기로 한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태운 통학버스가 길가에 서 있다.
벌써 점심때가 되었나?
학교에 다녀오는 길이냐고 물었더니
가겟집 아이가 이제 학교에 가는 길이라 한다.
나는 아침밥을 먹는 가겟집 식구들 곁에 앉아
다른 별의 시간으로부터 갑자기 나타난 외계인처럼
하릴없이 아침 뉴스를 본다.
그곳에선 전쟁을 외치는 어느 나라 대통령의 연설과
어둠을 찢는 폭격이 시작되고 있다.


애기 배추를 갉는 토끼와
갉아먹힌 애기배추 그루터기에 속이 상하는 나와
통학버스와
이 아침밥의 시간들과
그 위에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시간들과......

김진경 / 지구의 시간 / 실천문학사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어릴적 '이상한 나라의 폴'이란 만화를 보면 일상속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면 갑자기 시간이 멈춘다. 그리고 인형이었던 녀석이 방망이를 두들겨 '대마왕'이 '리나'를 납치해 간 다른 세계로 간다. 모험을 마치고 돌아오면 이 세계의 시간은 아직 멈춰있다. 이 만화를 즐겨봤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종종 나만 빼고 세계의 시간이 멈춰버리는 상상을 많이 했다.

중학교에 다닐 때였던 것 같은데, 하루는 어느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해가 지기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 친구네 집은 우리 집에서 좀 먼 곳이었는데, 꽤나 많이 걸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 친구네 집에서 재밌게 놀다가 나온 순간부터 집으로 가기 위해 골목 골목을 지나며 걷는 동안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나를 제외하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주위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처럼. 그 길은 큰 길은 아니었지만 골목마다 따닥따닥 붙어있는 집들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었고, 내가 걸었던 시간은 해가 지기 조금 전이었다. 꽤 먼 거리를 걷는 동안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경험이었다.

무서웠다! 갑자기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느낌에 겁이나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빨라졌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골목에서 갑자기 다른 세계에 속한 무언가가 나를 덮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어릴 적 만화에서 '폴'은 인형과 개가 함께였지만, 나는 혼자였다.

큰 도로에(왕복2차로였지만 우리동네에서 유일한 포장도로였다!) 나와서도 사람을 보지 못했다. 차도 한대도 지나가지 않았다.(당시에는 도로에 차가 많지 않아서 몇 분동안 차가 한대도 지나가지 않아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도로를 건너서 비탈길을 오르면서도 아직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이 길은 동네 사람들이 시장을 오가는 길이라서 평소 이 시간이라면 한 두 사람이라도 만나야 정상인데, 아무도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람을 만난 건 집에 거의 다와서였다. 서쪽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어느 아줌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내가 힘겹게 올라온 길을 사뿐히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오르막 길을 다 올라와서는 집 근처 공터에는 구슬치기를 하는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이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다른 의미있는 날, 예를들면 처음으로 좋아하는 감정을 가졌던 여자아이와 함께 단둘이 놀았던 날, 혹은 중학교 입학식이나 졸업식이 있었던 날, 혹은 처음으로 기타를 갖게 된 날 등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이 날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이 날이 나에게 특별히 어떤 의미 있는 날도 아니었는데, 당시 친구집에서 뭘 하고 놀았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그 시간만큼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무척 강한 인상을 남겨준 김진경 시인의 시를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 책을 산게 벌써 몇 달전이었는데, 이제서야 시들을 주욱 살펴봤다. 한 편 한 편의 시들이 모두 고르게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인이 생을 대하는 태도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알 수 있었다.

시인에게 지구의 시간이 멈춰버린 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 그리고 하필 그 날 내게 시간이 멈춰버린 건 또 어떤 이유 때문일까? 혹시 '폴'이 '삐삐'와 '찌찌'를 데리고 어른들은 모르는 사차원 세계에 다녀오면서 실수로 나의 시간을 멈추지 못했던 건 아닐까? 혹시 지금쯤 '폴'은 '대마왕'에게서 '리나'를 구해내었을까? 아무래도 이 만화를 끝까지 다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갑자기 마지막에 '리나'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무지 궁금해진다!



Posted by 감은빛

먹염바다


바다에 오면 처음과 만난다

그 길은 춥다

바닷물에 씻긴 따개비와 같이 춥다

패이고 일렁이는 것들
숨죽인 것들
사라지는 것들

우주의 먼 곳에서는 지금 눈이 내리고
내 얼굴은 파리하다

손등에 내리는 눈과 같이
뜨겁게 타다
사라지는 것들을 본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 사이

여기까지 온 길이
생간처럼 뜨겁다

햇살이 머문 자리
괭이갈매기 한 마리
뜨겁게 눈을 쪼아 먹는다


이세기 / 먹염바다 / 실천문학사



이십년동안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바닷가 바로 뒷 산에 살았다. 우리집 베란다에서는 멀리 바다가 보였다. 어릴때부터 나는 베란다에 나가서 그 먼 바다를 한없이 보고 있는 것이 좋았다. 바다가 무척 가까웠지만 자주 가지는 않았다. 주로 산에서 놀았다. 가깝다곤 해도 어린 나이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고, 버스를 타고 찾아갈줄도 몰랐던 때였다.

중학생이 되어서부터 가끔 친구들과 바닷가에 놀러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기억속에 그 바다는 늘 겨울바다였다. 정말 겨울에만 그 바다를 찾아간 건 아니었을텐데, 이상하게 여름에 그 바닷가를 갔던 기억은 없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 마음대로 술을 먹고 담배도 피워도 누가 뭐라하지 못할 때부터는 가끔 혼자서 그 바닷가를 찾아가곤 했다. 그 때도 늘 겨울이었다. 매년 여름이면 발 디딜틈도 없이 사람들로 꽉 차있던 그 넓은 모래사장에는 거짓말처럼 사람하나 없었다. 나는 '끼룩 끼룩' 울어대는 갈매기들을 눈으로 쫓으며 하릴없이 백사장을 서성이다가, 한 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연기를 바람에 날려보내다가, 끊임없이 밀려오고 또 밀려가는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며 젖은 모래사장에 내 발자국을 찍으며 걸었다. 등 뒤로 다시 밀려온 파도가 내 발자국을 지워나갔다.

바다는 모름지기 겨울에 와야 제 맛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여름의 바다는 눈요기를 하거나 뜨거운 몸을 식히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바다의 참 맛을 즐기기는 어렵다. 겨울 바다에 서면 사막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홀로 파도와 마주하고 있노라면 오롯이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차가운 바람이 내 뺨을 뜨겁게 태우고, 따뜻한 모래밭이 내 발을 감싸 안고, 파도 소리가 나를 끌어안으면 나는 고단하고 외롭고 덧없는 일상을 벗어나 다른 세상을 만난다!

아! 겨울 바다로 달려가고 싶다!



Posted by 감은빛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


너무 깊이 들어와버린 걸까
갈수록 숲은 어둡고
나무와 나무 사이 너무 멀다
동그랗고 야트막한 언덕배기
천지사방 후려치는 바람에
뼛속까지 마르는 은빛 억새로
함께 흔들려본 지 오래
막막한 허공 아래
오는 비 다 맞으며 젖어본 지 참 오래


깊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내 아직 어두운 숲길을 헤매는 것은
헤매이다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은
아직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이다
깊은 골짝 지나 산등성이 높은 그곳에
키 낮은 꽃들 기대고 포개지며 엎드려 있으리
더 깊이 들어가야 하리
깊은 골짝 지나 솟구치는 산등성이
그 부드러운 잔등을 만날 때까지
높은 데 있어 낮은, 능선의
그 환하디환한 잔꽃들 만날 때까지


김해자 / 無花果는 없다 / 실천문학사



 사람 숲에서 길을 잃어 본 적이 있나? 글쎄 자주 있었던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떠올리려니 막상 생각나는 건 없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길을 잃는 건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자주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그렇게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한순간 다른사람처럼 느껴질 때, 나는 더이상 그를 찾지 못한다. 그를 향한 길에서 갑자기 길을 잃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길은 갑자기 없어지기도 하지만 또 갑자기 나타나기도 한다. 길을 잃었던가 싶으면 어느새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될 수 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깊숙히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 숲에서 길을 잃었는가? 두려워하지 마라! 더 깊숙히 들어가다보면 다시 길을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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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낮밥과 점심

시와 추억 2008.08.09 06:33


낮밥


삼남매가 평상의
반상에 둘러앉아
볼이 미어져라
상추쌈을 우겨넣는 근경을
열댓 발치에서
묵묵히 바라다보며
오져해하고 있는데
난데없는 큰 손 하나가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어머니였다


조성국 / 슬그머니 / 실천문학사


 이등병 시절, 처음 자대배치를 받은 곳은 최전방 철책선이었다. 연대본부에서 다른 동기들은 다들 군용 포차나 육공트럭을 타고 자대로 떠났는데, 우리는 인솔장교와 함께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어딘가에서 내려서 그곳에서 비로소 포차를 타게 되는데, 인솔장교는 전방에는 한번 들어가면 전화도 할 수 없게 되니까 미리 전화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한 사람당 2통의 전화를 쓰게 해줬다. 물론 전화카드나 동전은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동기들이 각각 부모님이나 여자친구 혹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집에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직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어서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친하게 지냈던 동기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그애는 받았다. 우리 부모님께 대신 전해달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삼켰다. 왠 여자애가 전화해서 내 소식을 전하면 그것으로 더 놀랄 양반들이었다. 그냥 전방으로 간다고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끊었다.

 대대본부를 거치고, 중대 본부를 거쳐 다시 소초로 이동하는데 며칠이 걸렸다. 소초에서는 앞으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진짜 고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에서는 전국 각지의 사람들을 다 만나는데,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물론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왠지 기억에 남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처음 소초에 들어갔을때, 가장 고참은 부산 사람이었고, 그 바로 밑에 있던 고참이 광주사람이었다. 왕고인 부산 사람은 내가 들어가고 오래지 않아 제대했다. 나는 화기분대 기관총 탄약수로 들어갔는데, 화기분대장이 바로 두번째 왕고였던 광주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무척 잘해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사람이 나와 마주치면 매일같이 했던 말이 바로 '낮밥문냐?' 였다. 난 전라도 사투리를 하나도 몰라서 '낮밥'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다. 안그래도 어리버리하던 이등병시절, 천천히 또박또박 잘 말해줘도 긴장해서 두세번은 '잘 못들었습니다!'라고 소리지른 후에야 비로소 고참이 무슨 말은 하는지 알아들었던 시기였다. 그가 내게 다가와 '낮밥문냐?'라고 말하는데, 도무지 무슨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조건 '잘 못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세번째였던가 네번째였던가 계속 내가 못알아듣자, 결국 그는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퍽 치고는 '낮밥 무긋냐고?'라며 언성을 높였다. 그래도 '낮밥'이 뭔지 몰랐던 나는 계속 '잘 못들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숙인 나를 내버려둔채 그냥 가버렸고, 나중에 다른 고참이 '낮밥'이 점심이라고 말해주었다. 낮밥, 이 쉬운 말을 왜 못알아들었을까? 이 시를 읽는 순간 그 고참의 얼굴과 목소리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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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콩, 너는 죽었다


콩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콩, 너는 죽었다



김용택 / 콩, 너는 죽었다 / 실천문학사


 이 시를 처음 알게 된건 아이와 함께 백창우의 노래를 들을때였다. 맛깔스러운 음성에 재밌는 노랫말이 인상적이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김용택의 시에 곡을 붙여서 만든 노래였다.

 아이는 이 노래를 제법 좋아했다. 아직 따라부르지는 못하지만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이 부분에서는 깡총깡총 뛰면서 콩을 쫓아가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이 시집을 처음 보고 '어, 이건 동요 제목인데, 원래 김용택 시인의 동시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펼쳐보니 재밌는 시들이 많았다. 천천히 아이에게 읽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좀 더 크면 좋은 동시들을 하나하나 들려줘야 겠다고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웃음이 머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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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가는 노랑꽃 핀 얼굴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도종환 / 접시꽃 당신 / 실천문학사



 도종환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시를 좋아하는 한 후배를 통해서였다. <접시꽃 당신>이란 이 유명한 시는 제목은 자주 들었지만 한번도 시 전문을 읽어볼 생각을 못하고 지냈다. 그때 나는 이미 시를 읽기에는 너무 타락한(혹은 시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영혼이었다. 그 후배는 나를 통해 시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가 시에 한창 빠져서 나에게 시를 이야기 할때 정작 나는 더이상 시를 읽을 수 없는 상태였다.

 우연히 이 시집을 손에 넣자마자 이 유명한 시를 찾아 읽었다. 역시 나는 시적 감수성이 사라져버린 것일까? 별 감흥이 없었다. 나는 이내 이 시집을 기억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러다가 바쁘게 지내던 어느날 작은 일로 아내와 다투고 출근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괜히 책상 정리를 하다가 이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머리도 식힐 겸해서 천천히 읽었다. 처음에 그냥 읽었을 때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저 한때 어린 열정으로 시를 읽고, 뭔가를 끄적이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시를 모른다. 시에 대한 고민 없이 오랫동안 살아왔기에 시가 무엇인지 이제 다 잊어버렸다. 아내와 싸운 후, 난 무딘 내 감성이 참 낯설게 느껴졌다. 이런 무뚜뚝한 감성으로 잘도 운동판에서 살아남았구나 싶었다. 새만금 방조제에서, 천성산과 금정산에서 그리고 평택 대추리 벌판에서 생명의 가치를 말하는 나에게 날아든 곤봉과 방패날이었고, 군화발과 주먹이었다. 나는 감수성을 잃어버리고 그저 당위로만 운동판을 버텨왔다. 그래, 나는 스스로 감수성을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가슴이 터져서 죽을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제 다시 깨닫는다. 예민한 감수성은 시퍼렇게 날 선 칼날이다. 감수성은 활동가가 가져야 할 가장 훌륭한 무기이다. 스스로 무기를 버린 전사라니 얼마나 허무한가. 이 시를 다시 읽으며 내가 왜 다시 시를 읽어야 하는 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 다시 시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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