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개조심


봉은사 다들 아시죠
신라 때 연회스님이 견성사란 이름으로
처음 창건하였다는 봉은사
흔히들 이런 절을 천년고찰이라고 부릅니다
연회스님은 신라의 고승으로
늘 법화경을 읽고 보현관행을 수행하였는데
정원 연못에 연꽃이 피어 항상 시들지 않았다고 하지요
이렇게 유서 깊은 절이
삼성동 73번지 큰 길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뭇 중생들 곁으로 아주 가까이
다가서 있는 것이지요
그 봉은사 경비실 담벼락에
개 만지다 물리면 책임지지 않습니다
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고승의 화두 같기도 하고
선방 스님의 선문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대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라
쓸데없이 개를 만지려다 물린 사람과
책임지지 않겠다는 절간의 경비들이
고만고만하게 모여서
한바탕 재밌는 일이 벌어질 만도 한데
일이 커지면
도량 넓은 스님들이 발뺌이야 하겠습니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개한테 물리면 아프니까
봉은사에서 책임져준다고 해도 만지지 말아야지요


임희구 / 삶과 문학 / 삶이 보이는 창




 멋진백작님의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강남 삼성동 봉은사에 걸린 바른말 현수막'  이란 글을 봤다. 잠깐 봉은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절 이름인데, 어디서 들었을까? 분명히 최근에 봉은사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근데 강남이라 그쪽 동네는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곳으로 평생 인연을 맺기 어려운 동네인데, 그렇다면 내가 알 수가 없는데, 왜 이렇게 이름이 익숙한 것일까?

 한참동안 고민을 했다. 결국 생각이 안나서 그냥 포기하고 일을 했다. 요즘 계속된 야근에 몸이 많이 망가졌다. 감기몸살기운도 있는데, 오늘 안에 정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도 못자고 오늘도 벌써 새벽 3시를 훌쩍 넘겨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다.

 서둘러 책장을 뒤졌다. [삶과 문학]을 꺼내들었다. 책장을 스르르 넘기다가 찾아냈다. 임희구 시인이 쓴 '봉은사 개조심'이란 시를 펼쳐들었다. 지난 6월에 있었던 [삶과 문학] 출판기념회에서 임희구 시인이 직접 낭독하는 이 시를 들었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 그 장소가 좀 소란스러웠고, 시인은 마이크도 없이 그냥 육성으로 낭독했기에 잘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책을 찾아보고 시가 좀 특이하다고 느꼈다. 좀 재밌다고 생각되긴 했지만 곧 이 시를 통해 시인이 전하고 싶은 목소리는 무얼까 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글쎄, 삼성동에 봉은사라는 천년고찰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테고, 그냥 개를 만지려다 물리면 책임지지 않는다는 팻말이 재밌어서 즉흥적으로 지은 것은 아닐까? 쉽게 추측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그러나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다.

 요즘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을 경찰이 강제로 검문한 이후로 불교계 전체가 대대적인 반정부투쟁에 나서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금 명박이와 어청수가 하는 짓거리를 보면 아무리 도량이 넓은 스님들이라도 도저히 참기 어려울 것 같다! 아니 정말 민중을 위해 애쓰시는 스님이라면 마땅히 이 어이없는 정권에 맞서야 하는게 당연할 듯 싶다!

 나는 종교가 없기에 특별히 불교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하진 않지만, 새만금 삼보일배를 진행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셨던 수경스님과 생명평화탁발순례를 오랫동안 해오신 도법스님, 그리고 금정산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문제로 오랫동안 여러차례 단식을 하셨던 지율스님 등 많은 훌륭한 스님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알게모르게 깨달은 바가 있어 불교를 조금은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이명박이라는 천박한 인간이 옛날에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을 때, 참 황당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떻게 한 나라의 수도를 책임지는 시장이라는 작자가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때 나는 서울시민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명박이가 아직도 시장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청계천을 파헤쳐서 오랫동안 그 지역에 계셨던 분들을 쫓아내고 있을 때 잠깐 서울시민이었던 적이 있다. 그때 명박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혼자 기분나빠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나는 명박이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인가?

 명박이가 대통령선거에 나온다고 했을 때, 나는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렇게 천박한 인간이 설마 대통령이 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 설마가 진짜 이루어졌고, 그래서 전 국민이 광우병 쇠고기를 먹어야 하고, 의료와 수도 등 공공부문 민영화 때문에 걱정해야 하고, 잘못된 교육정책으로 모든 학생들이 괴로워해야 했다. 선량한 시민들은 볼순세력이니 폭도니 하는 말들로 매도되어야 했고, 경찰의 방패에 맞아 피흘리고, 군홧발로 밟히고, 연행되어 48시간동안 자유를 구속당하고 100만원에서 400만원 사이의 벌금까지 내게 되었다. 도로와 인도를 모두 막아 통행권 및 이동권을 침해하고 심지어 횡단보도까지 막아놓고도 지들이 저지른 짓이 불법인지 모르는 경찰이 미성년자를 폭행하고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인도에 가만히 서있는 사람들까지도 무조건 잡아 넣고는 적립금인지 마일리지인지를 챙겨가는 등 무슨 게임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 경찰이란 이름의 폭력집단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 또 얼마전에는 젖어버린 얇은 티셔츠 하나만 걸친 여성에게 강제로 브래지어를 벗긴 일이 밝혀져서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하는데, 경찰이 브래지어도 흉기가 될수 있다고 짖었다고 한다. 왜 팬티도 마저 벗기지 그랬니? 이러고도 국민의 세금을 받아 처먹고 있으니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먹고사는 놈들이 나를 두들겨패고 잡아가둬도 찍소리 하나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참 어처구니 없는 세상이 되었다.

 아,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열만 받고 기분만 나빠진다. 일이고 뭐고 다 관두고 잠이나 자야겠다. 비가 온다. 창문으로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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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반성

 전태일(노동자, 1970년 11월 13일, 열악한 노동현실 고발하며 분신)
 김진수(노동자, 1971년 5월 16일,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구사대에 의해 사망)
 김경숙(노동자, 1979년 8월 11일, 신민당사 농성 강제 해산 도중 사망)
 박영진(노동자, 1986년 3월 17일, "근로기준법 및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치며 분신)
 정낙현(노동자, 1988년 노동운동 중 목매 자살)
 문송면(노동자, 1988년 7월 2일, 산업재해 - 수은중독 - 로 사망)
 성완희(노동자, 1988년 7월 9일, 동료의 복직투쟁 중 회사측의 탄압에 맞서 분신)
 송철순(노동자, 1988년 7월 15일, 노조사무장으로 파업 도중 현수막을 걸다가 추락 사망)
 김종수(노동자, 1989년 5월 4일, 파업 중 "무노동 무임금 철폐" 외치며 분신)
 조정식(노동자, 1989년 5월 24일, 노동운동가로 산업재해로 사망)
 최종길(교수, 1973,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
 박종철(학생,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사,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됨)
 박래전(학생, 1988년 6월 6일, "광주학살 원흉 처단 군사파쇼 타도"외치며 분신)
                                    .
                                    .
                                    .
                                    .
                                    .
                                    .

 마석 모란공원의 안내판에 나를 비춘다
 너도 저럴 수 있느냐?


맹문재 / 전태일열사 30주기 기념시집 『너는 나의 나다』 / 갈무리




 '그 죽음을 기억하라!' 아마도 강풀의 '26년' 1화의 제목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 촛불집회에 가면을 쓰고 나와 폭죽을 터뜨린 온라인 영화동호회 사람들 덕분에 찾아서 본 <브이 포 벤데타>의 첫 장면에서도 '리멤버 리멤버 더 핍틴스 노벰버' 라고 말하고 있다. 가이 포크스가 이른바 '화약음모사건'을 일으킨 날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귀한 죽음을 기억해야 할까? 시인이 저렇게 많이 적어놓았지만 아직 훨씬 더 많다! 여기에는 70년대 80년대 노동운동을 하신 열사들을 위주로 적혀있을 뿐이다. 그 이전과 그 이후 그리고 농민운동이나 학생운동을 하시다 돌아가신 열사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이름들을, 이 아름다운 죽음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고, 수학공식 하나 더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분들이 어찌하여 이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시를 읽으면서 시인과 함께 반성을 해본다. 과연 너도 저럴 수 있느냐고.


2008/08/10 - [시 한자락] - 배수진을 친 집 - 맹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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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한 보름쯤 전부터 아이가 임을위한 행진곡과 함께 자주 부르는 노래가 흔히 '울라송'이라고 부르는 노래다. '이면바븐 물러가라 물러가라 어떵뚜도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이 노래를 온갖 버전으로 편곡하거나 개사해서 부르고 돌아다닌다. 그래서 한번 정리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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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밥 때문에

시와 추억 2008.08.09 12:54

우체국을 가며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보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소개서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生)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1987년 포철공고 졸업 1991년 육군 만기제대
이따위 먼지까지 탈탈 털어서 간다


황규관 / 패배는 나의 힘 / 창비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살때 나는 자유로웠다. 일하고 싶지 않을 때는 그냥 놀았다. 대신 소비를 줄이면 그만이었다. 정 돈이 떨어져 밥을 굶을 지경이 되면, 노가다라도 한탕 뛰면 그만이었다. 돈이 없어도 어떻게 밥은 먹고 살 수 있었다. 돈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을. 뭔가 갖고 싶은 것이 생기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알바를 뛰든 어쩌든 일을 구해서 돈을 벌었다. 원하는 만큼 돈을 갖게 되면 또 일을 그만두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다.

 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면 정말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기 일쑤다. 사정이 생겨 일을 쉬게되면 학원강사를 하거나 이런저런 일들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한동안은 버틸 수 있었다. 내가 가고 싶으면 전국 어디든 원하는 곳에 가서 활동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바닥은 늘 사람이 아쉬운 곳이고, 특히 지역으로 갈수록 더 하기 때문에 마음만 맞는다면 일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점점 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줄어들었다. 한때 다니던 단체를 그만두고 다른 곳을 알아보게 있었다. 수도권을 벗어나 지역으로 내려가면 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아내의 직장과 집 때문에 섣불리 모험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닥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다시 서울에 있는 단체에 들어갔다. 큰 보람도 없고 활동에 대한 의욕도 없었다. 그냥 당위성 하나로 버티는 나날이었다. 내가 원하는 선택은 넓은 대한민국 땅 전국 곳곳에 있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좁디좁은 서울바닥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날, 가슴 속에서 치받아 올라오는 그 답답함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의 선한 눈매와 웃고 있는 얼굴이 기억난다. 이번 촛불 집회를 통해 여러 차례 스쳐 지나게 되었다. 작가회의 깃발을 보게되면 근처에는 반드시 황규관 시인이 있었다. 그의 시를 찾아 읽기 전에는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시집 한 권을 찬찬히 읽으면서 그에 대해 조금은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그는 어떨까? 이렇게 영혼을 팔아서 서울에 올라온 지금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앞으로 나올 또다른 시를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볼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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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소를 웃긴 꽃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 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윤희상 / 소를 웃긴 꽃 / 문학동네



 그를 처음 만난 날은 가장 많은 시인들을 한꺼번에 만난 날이었다. 그 날은 『삶과 문학』출판기념식이 동대문 어느 식당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던 날이다. 대부분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가인 <삶과 문학> 동인들이 이십여명 모여서 식사를 하고 책의 출간을 축하했다. 그리고 다같이 촛불집회 장소인 시청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작가회의 소속의 다른 작가들과 합류했다. 행진대오가 행진을 마칠 즈음 작가들과 함께 동아일보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사를 나누면서 보니 대부분 다 시인이었다.

 그 날 윤희상 시인을 처음 만났다. 무척 겸손하고 점잖은 모습의 그는 몇몇 작가들과 인사를 나누고 어디론가 갔다가 나중에 다시 와서 내 옆에 자리잡고 앉았다. 처음에는 다른 작가들과는 별로 말을 나누지 않고 옆에 있는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나에게 조심스레 건네는 몇 마디 말들로 나는 그가 무척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노점상연합회에서 나눠주는 순두부가 맛있다고 꼭 먹으라고 내 손을 잡아 끌고 가기도 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매일 밤 촛불집회에 나와서 밤을 새고 아침 해장국을 먹고 출근하는 걸로 유명했다. 그 보다 한참 선배뻘되보이는 어느 시인이 그에게 이제 그만 밤새고 집에서 가족들도 좀 돌봐야하지 않느냐는 말을 했다. 그 유명한 명박산성이 쌓아지던 순간에도 그가 몇몇 신문 기자들에게 제보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를 알게 되었다. 그가 어떤 시를 썼는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냥 그렇게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윤희상이라는 이름을 내 머리속에 집어넣었다. 시간이 늦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서 그와 나는 둘이서 조금 더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계속 나에게 시를 써보라고 했다. 나는 뭐라 대답을 못하고 그냥 웃기만 했다. 성명서는 좀 써봤고 이런저런 잡다한 글들을 조금 써봤지만 과연 내가 시를 쓸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글쎄 나는 시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시가 의외로 쉽다고 계속 나에게 시를 권했다. 왜 그랬을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적극적으로 말하는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지긴 했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를 잊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어느 저녁 촛불집회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그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었고, 나도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었다. 우린 눈이 마주쳤고, 잠시 인사를 나눴다. 그가 나에게 뭔가 말을 건넸던 것 같은데 주위가 소란스러워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냥 인삿말이겠거니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의 시를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집을 구입했다. 그의 시는 내가 그에대해 느꼈던 첫인상만큼이나 좋았다.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세상만물을 향한 그의 따뜻한 시선이 부러워졌다! 이런 멋진 사람과 잠시나마 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이 기쁘다!

2008/06/17 - [삶의 흔적속으로/감은빛 하늘아래] - 14일 토요일 촛불집회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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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은빛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동안 아내와 아이와 함께 촛불 집회에 다녀왔다. 좀 많이 지쳤다. 평일에 혼자 나가면 밤을 새기는 체력적으로도 부담스럽고 게다가 밤새도록 혼자 할일도 마땅찮아서 적당히 있다 돌아와야 하는데, 집이 멀어서 늘 막차시간을 걱정해야 한다. 주말엔 좀 늦게까지 있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편하게 나가는데, 문제는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혼자 나와있으면 집에서 혼자 아이를 돌볼 아내에게 미안하고 그렇다고 아이를 데리고 나오면 아이때문에 적당한 시간에 집에 돌아가야 한다.

암튼 아내와 미리 약속하고 금요일과 토요일 집회에 아이와 함께 참여했다. 금요일엔 아내가 약간 몸이 안좋았는데, 감기몸살 기운이 있었다. 아이도 콧물이 조금 나왔다. 김밥집에서 사온 김밥을 먹으며 집회에 앉아 있다가 행진을 따라갔다. 행진이 시작될 즈음에 아이와 함께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이미 행렬 후미까지도 서울역방향으로 한참 가 있는 상황이라서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갔다. 광장에서 잠깐 리얼리스트 100소속 작가들을 만났다. 자주 만난다고 인사말을 나누고 헤어졌다. 명동방향으로 열심히 따라가서 행진에 참여했다. 아이는 신나서 구호를 따라 외치고 손동작을 따라했다. 뒤따라오는 대학생들 중에서 한 여학생이 계속 아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이의 자연스러운 손동작이 무척 신기했던 모양이다. 우리 아이도 FTA국면때부터 여러번 거리행진과 촛불집회등에 참여했으니 여느 운동권 활동가 못지않은 경력이다.

대책회의의 방송차가 선두에서 사람들을 이끌었는데, 큰길로 쭉 가면 될것을 자꾸 작은길로 돌아가는 바람에 조금 화가 났다. 광화문에 들어서자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버린 차벽이 우리를 맞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직업경찰들이 차벽에서 너댓걸음 앞쪽에 노란 플라스틱 차량막이(이걸 뭐라 불러야할지 몰라서)를 늘어놓고 서너줄로 늘어서 있었다. 제일 앞줄에는 여경들이 늘어서 있었다.

우린 적당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있었다. 예전 사무실 동료도 잠깐 만났다. 한참 노래를 틀고 구호를 외치던 방송차가 갑자기 시청으로 가자며 사람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금요일이라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순식간에 다 빠져나가버리고 소수만 그 자리에 남았다. 집회때 식코라는 영화를 시청광장에서 상영할거라고 광고하더니 거기로 사람들을 다 데려간 모양이었다. 소수가 남았으니 이제 곧 진압을 할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갑자기 경찰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교보문고쪽 인도방향에서는 징그러운 검은 개미떼가 연상되는 전경들이 꿈틀꿈틀 기어나왔다.

시간이 조금씩 흘러가면서 거리에 남은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었고, 경찰들은 눈에 띄게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있었기에 그리고 오랜 집회경험으로 예민해진 내 감각은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의료지원단으로 보이는 흰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쓴 한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와 아이를 데리고 뒤쪽으로 가시라고 말했다. 나는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알아서 할테니 걱정말라고 했다. 사실 남아있는 사람들의 숫자로 봐선 이 공간을 사수하긴 틀린 것 같아 보였다. 대충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일어날 생각이었다. 광장에서 영화를 볼 기분은 아니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아내랑 아이는 몸이 좋지 않았고, 나도 일주일치 피로가 밀려들어서 제법 피곤했다.

행진하면서 잠깐 잠들었다가 깼던 아이는 뒤늦게 활발하게 돌아다니며 놀았는데, 우리가 가려고 하니 많이 아쉬워했다. 여경들이 뒤로 빠졌다. 아마 전열을 가다듬은 후에 어느 한쪽으로 배치되고, 양쪽에는 전경들이 배치되어서 곧 밀고 들어올 분위기인 듯 했다. 우린 미련없이 뒤로 돌아 나왔다. 시청역을 향해 걸었다. 이미 도로에는 차들이 다니고 있었다. 세종로 사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의 그 좁은 공간만이 섬처럼 남아 있었다. 경찰들이 강제해산시키고 나면 곧 없어질 공간이었다.

시청역을 향해 지하로 내려가면서 광장을 슬쩍 보고 갈까 생각하다가 기분이 더 나빠질 것 같아서 그냥 지하철을 탔다. 잠든 아이를 안고 먼 길을 돌아오면서 아내와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서운 거라고 촛불의 진정한 적은 아마도 대책회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한번 진지하게 해보았다.

토요일엔 늦게 일어나서 뒹굴거렸는데도 피로가 쉽게 가시지 않아서 밥먹고 한동안 아이랑 놀다가 또 잠들어버렸다. 인터넷 언론들의 기사를 읽으니 우리가 돌아온 다음 경찰들이 사람들을 인도로 내쫓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교보 앞쪽에 있던 전경들이 폭력적으로 사람들을 밀어냈고, 그 소식을 들은 시청광장에서 식코를 보던 사람들이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직업경찰들이 아닌 전경들이 전면에 선 강제해산 작전이 다시 벌어졌고 사람들은 인도로 밀렸다가 경찰들이 틈을 보이면 다시 거리로 내려섰다고 한다.

게다가 황당했던 건 대책회의쪽에서 명박산성에 맞서 국민토성 혹은 민주토성이라 불리는 것을 쌓아보려고 모래를 주문했던 모양인데, 새벽에 모래 트럭을 두 대나 경찰에 뺏겼다고 한다. 전 날 집회에서 모래주머니를 갖고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런 발상을 한 심정은 이해했으나 조금 쓸데없는 짓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비싼 돈 주고 사왔을 모래를 그렇게 허망하게 경찰에 뺏겨버린 것이다.

만약 안 뺏기고 무사히 모래가 오고 사람들이 즐겁게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광화문으로 가져가서 쌓는다. 그런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우리는 차벽을 넘어 청와대로 가던가 아니면 청와대만 지키는 경찰들을 비웃으며 서울시내 곳곳에 있는 다른 곳들을 다니면서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하면 되는 것이다. 경찰이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매일 만들어 놓은 저 폭력을 넘어서 우리의 올바른 목소리를 전할 의지가 없다면 거기에 밤새도록 앉아 있어도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모래주머니를 쌓아봐야 뭘 어찌 할 것인가? 그깟 모래주머니 쌓은 후에 넘어가겠다고? 국민들이 기껏 모금해준 돈으로 쓸데없는 짓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그닥 편치 않은 마음으로 토요일 집회에도 참여했다. 역시 아내와 아이와 함께였다. 이번에는 지난번 6월 10일 등장했던 크레인에 매달린 대형 스피커가 보였다. 조금 오버가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지 몰라도 저 정도 크기의 스피커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무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언론재단 앞쪽에 앉아 있었는데도 스피커 소리가 너무 커서 불편했다. 아이도 계속 소리가 너무 크다고 불평을 했다. 실제 사람들의 대열은 한참 앞에서 끝나 있었고 그 뒤로는 띄엄띄엄 앉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집회가 끝날때쯤 박원석 상황실장이 남성분들 천명만 무대뒤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모래를 실은 차가 서울역 근처에서 경찰에 막혀 있는데 사수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집회가 끝나고 사람들은 조금 걸어서 광화문으로 갔다.

걷는 중에 작가회의와 리얼리스트 100의 깃발을 보고 얼굴을 아는 몇몇 작가들과 인사를 했다. 잠시 걷던 행렬이 멈추고 두대나 되는 방송차의 음악과 구호를 따라 노래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치며 사람들은 서 있었다. 아이가 졸려했고 나는 횡단보도쯤에 자리잡고 앉아서 아이를 재웠다. 경찰방송차는 보이지 않았는데, 차벽 뒤에서 늘 듣던 여성의 목소리로 늘 듣던 똑같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간혹 경찰 간부는 아닌듯한 조금 젊은 남성의 목소리로도 경고방송이 나왔다. 나중에 읽어보니 인터넷 언론들에서도 일제히 이날의 기사에는 방송을 통한 설전을 주 기사로 쓰고 있었는데, 이날은 정말 경찰쪽과 우리쪽이 지겹도록 마이크를 잡고 입씨름을 벌렸다.

여경(아마도 여경이 맞겠지)이 계속 폭력을 자제하라고 방송을 해대는데, 도로를 막고 사람들의 보행권과 이동권을 박탈한 너희들의 거대한 폭력부터 거둬들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 여자는 계속 시위대를 일반시민과 폭력을 부추기는 일부 세력으로 나눠서 말하곤 했다. 그리고 경찰은 절대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식의 방송을 했다. 그래놓고 버스에 들어가 있던 경찰들이 소화기를 뿌리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략 한시간쯤 잤을까? 안고 있는 팔이 저려올 무렵 아이가 깼다. 화장실을 데려가기 위해 코리아나 호텔에 들어갔다가 나오니 비가 왔다. 우비를 챙기려 했으나 집에서 나서는 순간 서두르느라 잊고 나오는 바람에 우린 우산외에 비를 피할 수단이 없었다. 아이가 비를 맞고 감기에 걸릴까 무서워서 집에 가야하나 생각을 했다. 한동안 코리아나 호텔 입구에서 비를 피하고 서 있었는데, 철도노조인지 확실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그쪽 노조 이름이 찍힌 트럭이 나타나면서 상자 하나를 거리에 있던 사람에게 던져주고 앞으로 갔는데, 우비가 든 것 같았다. 역시 사람들이 상자를 열고 우비를 나눠줬다. 나도 얼른 가서 우비를 2개 챙겼다. 나와 아이가 우비를 입고 아이에게는 아내가 혹시 몰라 갖고 온 방수가 되는 검은 잠바를 입혔다. 그리고 거리로 나왔는데, 허무하게도 곧 비가 그쳤다.

땅이 젖어 앉지 못하고 잠시 서 있었다. 아내와 아이가 배고프다해서 옥수수랑 핫도그를 하나씩 샀는데, 오늘도 노점상연합회에서 순두부를 나눠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난 서둘러 아내에게 말해 한 그릇 받아오게 했다. 버스 정류소에 설치된 긴 의자에 앉아서 핫도그와 순두부와 옥수수를 나눠먹었다. 나도 순두부를 한그릇 받아와서 먹었다. 역시 맛있었다. 문득 일주일 전에 만났던 윤희상 시인이 생각났다. 그 분도 지금 여기 근처에서 순두부를 드시고 계실텐데 싶었다.

배를 채우고 다시 앞쪽으로 갔더니 차벽 중간 쯤에 모래주머니를 집중적으로 쌓아올려서 차벽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고 깃발을 든 사람들이 차벽위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 차벽은 세 겹이었는데, 그중 제일 뒤쪽 차벽이 차 위에 방패막이가 된 차들이었고, 그 뒤에서 전경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채증을 했고 소화기를 뿌려대기도 했다.

이어서 밧줄을 든 남자들이 뛰어왔다. 오늘도 차를 끌어내려나보다 싶었다. 그래 저 모래 쌓아놓고 저기 올라가봐야 넘어가지도 못할 것을, 모래 트럭만 죄 뺏기느니 차라리 그런 쓸데없는 짓 말고 밧줄이나 대량으로 가져와서 차벽을 확실하게 해체하는 작전을 짜는 게 나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앞쪽에서는 차에 밧줄을 묶는 사람들과 이를 저지하기 위해 소화기 분사를 비롯하여 각종 방법으로 막으려는 경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그 그 뒤쪽에는 응원하는 시민들이 열심히 노래와 구호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거리를 두고 뒤쪽에는 오마이뉴스가 자발적 시청료를 1억넘게 모아서 사들인 대형 스크린을 갖춘 방송차가 있었다. 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무슨 스포츠 중계보듯이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불과 일이백미터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그냥 앞쪽으로 와서 보면 다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굳이 거기에 앉아 야구 보듯, 축구 보듯 시위를 관람중이었다.

앉을 자리를 찾으면서 앞쪽으로 향해 걷고 있는데, 한 아줌마가 뒤쪽에서 후다닥 뛰어오더니 나를 향해 두서없는 말들을 뱉어냈다. 아마도 오마이뉴스 방송차의 화면을 보고 놀라서 온 모양인데, 전경들이 지금 불을 지르고(아마도 소화기 분사 모습을 보고 불이 나서 연기가 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때리고 난리가 났는데, 남자들은 다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말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 군대 갖다온 남자들은 다 어디있나 뭐 이런 말을 뱉으면서 앞쪽으로 사라졌다.

아이를 안고 있지 않았어도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사람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앞쪽에 자리잡고 앉았다. 비가 왔고 또 시간이 늦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갔고 또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오늘은 끝까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와 함께 있다는 현실을 잠시 잊기로 마음 먹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으쌰 으쌰' 남자들이 밧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예전과 다르게 차는 쉽게 끌려나오지 않았다. 별써 예전부터 경찰은 차들끼리 와이어로 고정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밧줄이 더 필요하고 사람들이 더 많이 한번에 달라붙어야 할 듯 했다. 암튼 나도 밧줄을 한번 당겨보고 싶었다. 아이를 아내에게 넘기고 뒤쪽아 가서 앉아 있으라고 했다. 방송을 멈춤 방송차가 서있는 곳 부근에 아내는 자리를 깔고 아이와 함께 앉았다.

나는 한쪽 장갑을 얻어끼고 열심히 밧줄을 당겼다. 줄다리기는 원래 많은 사람들이 박자를 맞춰 함께 당겨야 하는 것인데 줄이 길고 줄 주위에 사람들이 시야를 방해하는 데다가 정확한 구령등이 없어서 제대로 힘을 쓰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가 한참 당기고 있는데, 서대문 방향에서도 또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갑자기 밧줄을 당기던 사람들이 쓰러지고 몇몇이 다친 듯 했다. 나중에 구급차가 여러대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싣고 갔다. 방송차에서 사람들이 다치니 밧줄을 그만 치우자라는 말을 했다.

밧줄을 당기는 시간보다 밧줄을 제대로 고정하는데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는 듯 했다. 나는 뒷쪽에 있어서 앞쪽 상황을 알 수 없었는데, 밧줄은 자주 앞으로 가서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밧줄이 앞으로 가버리고 나면 나는 뒤로가서 아내와 아이가 어떤지 보고 오곤 했다. 그런데 한참 밧줄을 당기는데 전화가 왔다. 멈추라는 손짓과 요청이 오고 밧줄은 다시 앞으로 갔다. 전화를 받으니 아내가 돌아오란다. 가보니 사람들이 계속 귀찮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내가 펼쳐놓고 앉아 있던 은색 자리에 빈공간이 많으니까 중년 아줌마 두 사람이 함께 앉았는데, 계속 신경거슬리는 말들을 하더니 급기야 자리를 끌고 뒤도 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청계광장쪽으로 가자고 하면서 주인인 아내의 허락도 없이 자리를 끌고 가려고 해서 아내가 그만 집에갈 생각이니 나가달라고 했단다. 그런데 또 한 남성이 와서는 술냄새를 풍기면서 아이가 있으면 위험하니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내가 알고 있다고 괜찮다고 했는데도 이 남자가 천원짜리를 꺼내 아이에게 건네면서 자꾸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내가 돈을 거절하고 화가나서 내게 전화한 것이다.

이미 시간은 한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아내의 얘기를 듣고 이제 어찌할 것인가를 정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택시를 타고 영등포로 가면 아직 심야 버스를 타야했다. 아마 아직은 있을 테지만 더 늦으면 그것 마저도 끊기리라. 아니면 5월 마지막 밤, 물대포를 쏘던 그 날밤에 아내와 아이가 하룻밤 신세를 졌던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는데, 그 후로 아마 번호를 바꿨을 확률이 높고 이 늦은 시간에 또 전화하기에는 미안해서 그 방법은 제외시켰다. 다른 방법은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택시를 타고 장모님께 가는 것인데, 아내도 나도 조금은 망설여졌다.

나는 남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서 쉬고 샆은 마음이 반반이었는데, 상황을 보아하니 그닥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돌아가기가 아쉬웠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만 택시태워보내려니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택시를 타기위해 시청방향으로 걷는데, 오마이뉴스 방송차를 지나치는 순간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화면을 보니 밧줄에 당겨져서 차 한대가 조금 끌려나왔다.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던 차였다. 드디어 끌어냈구나. 하지만 광화문 앞을 막고 있는 수십대의 차 중에서 겨우 한대 끌어냈을 뿐이다. 시간이 더 늦어지고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면 또 경찰은 소화기와 방패와 곤봉을 앞세워 폭력진압을 할 것이다.

남아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다시 들었지만 이미 한번 가자고 말해버린 후라 그냥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아까 12시가 되기 전이었던가 예전에 내가 활동했던 단체에서 집행위원으로 계신 분을 잠깐 만났다. 반가워하시면서 시청앞에서 활동가들이 공연하고 있으니 잠시 들러보라고 했었다. 그 분은 이제 집으로 가신다고 했다.

시청광장으로 다가가면서 그 말이 떠올랐다. 아마 거의 밤새도록 공연을 할 것이다. 그 친구들은 그런 기획을 자주 했으니까. 잠시 들러보면 반가운 얼굴들을 좀 만나겠지. 하지만 몸도 피곤했고 아이를 안은 팔은 점점 더 무거워져갔다. 거기서 시간을 조금 지체하면 자칫 영등표에서 차가 끊길지도 모를일이었다. 그냥 서울역방향으로 조금 더 가서 택시를 탔다.

영등포에서 탈 버스가 여의도에서 출발한다는 얘길 택시 안에서 아내가 꺼냈다. 그러고보니 여의도 환승센터에서 타면 될 것을 굳이 영등포까지 더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기사님께 말씀드렸다. 이제 막 마포대교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여의도 환승센터에서 십분여를 기다려 버스를 탔다. 집 근처에서 버스를 내려 다시 십오분정도를 걸었다. 아이를 안은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시계는 안봤지만 아마도 두시 반은 넘었으리라. 피곤했다. 우리는 뽑지도 않은 멍청한 대통령 하나 때문에 삶이 너무 피곤하다!
Posted by 감은빛
일요일엔 서울까지 나가기가 힘들어서 부천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부천에서도 촛불집회를 한다는 소식을 지하철역 앞에서 선전전 나와있던, 부천지역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을 통해 들었다. 일요일 저녁에 시청과 중앙공원 사이 차없는 도로에서 촛불집회를 연다는 소식을 아내에게 전했더니 일요일이니만큼 서울까지 나가기 힘드니까 부천에서 참여하자며 반가워했다.

부천에 와서 깜짝 놀란 것 중의 하나는 한겨울을 제외하고 주말마다 시청앞 도로의 차량 운행을 통제하고 차없는 도로를 시행한다는 점이다. 주말이되면 여기에 미니 오토바이나 자전거 등 다양한 탈것들을 타고 놀고있는 아이들로 꽉 찬다. 주변에는 이런 것들을 대여하는 업체들이 잔뜩 있다. 이런 업체들이 시청이나 시의회쪽에 압력을 넣거나 로비를 해서 매주 주말마다 차없는 도로가 이루어지는데 큰 몫을 했으리란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암튼 평소에도 교통량이 아주 많은 곳은 아니지만, 그리고 비교적 짧은 구간이지만 그래도 이 공간을 주말이나마 차없는 도로로 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족은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촛불집회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7시가 다되어가는대도 주최측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영 시원찮았다. 빨리빨리 움직여서 준비를 해야할텐데 뭔가 손발이 안맞는 듯 해보였고, 어딘가 어설퍼보였다. 예전에 집회준비를 많이 해봤던 내 입장에선 이들의 움직임이 영 답답해 보였다.

7시가 넘었는데도 이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주최측의 일부는 도로에 야외용 깔개를 펼쳐놓고 앉았다. 시간이 흘러도 자리잡고 앉는 이들은 대부분 주최측과 관계된 사람들외에는 거의 없어 보였다. 에정시간을 한참 넘겨서 집회가 시작되었는데, 진행을 맡은 사람도 뭔가 어설펐다. 집회가 계속 진행되면서 이들은 계속 뭔가 손발이 안맞아서 크고 작은 실수를 연발했다.

좀 이상했다. 주최하는 사람들이 아마도 민주노총쪽 사람들이거나 공무원노조쪽 사람들인듯 보였는데, 왜이리 집회 진행을 잘 못하는 것일까? 아주 획기적이거나 아주 멋진 집회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작고 소박하고 평범한 집회라도 매끄럽게 잘 진행되기를 바랄 뿐인데, 이들은 보고 있는 사람이 안쓰러워질정도로 원활하지 못한 진행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회자가 자유발언 시민을 환영해달라고 했는데, 정작 자유발언을 할 사람은 없었고, 또한 사회자는 계속 자유발언을 신청한 사람이 많다고 했음에도 자유발언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구호하나 똑바로 못 외쳐주고는 그걸 시민들 탓으로 돌리는 사회자는 좋게 봐주기 힘들었다.

이럴거면 부천에서 하지말고 서울로 집중하던가 하지 이게 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공원 쪽에선 나이든 어른들이 우릴 손가락질하는 모습들이 보였는데, 그들에게도 우리가 얼마나 우습게 여겨졌을까 생각하니 화가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는데, 20대의 누구누구라고 사회자가 이름까지 소개한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친구가 앞에 나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뭔가 불만이 많은 표정과 말투였다. 난 당연히 그 불만이 이명박을 향한 것일거라고 여겼는데, 그 친구의 애길 듣고 있으려니 그게 아니었다. 그는 우리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교묘하게 말을하면서 우릴 속이려들더니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이 30개월이상 소는 수입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분명히 밝혔고 정부가 추가협상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국민들이 잠시 촛불을 멈추고 기다리는 성의를 보여줘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의 주장대로 이명박이 정말로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을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촛불을 멈춰야한다는 그의 주장은 멍청한 헛소리일 뿐이다. 국민들은 처음부터 한결같이 말해왔다. 재협상을 하라고, 말도안되는 거짓으로 국민들을 현혹시키려 하지 말고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고 재협상에 임하라고 말이다.

게다가 추가협상을 한다는 것 역시 정부와 조중동문을 위시한 보수언론의 더러운 거짓말이다. 김종훈이 미국에 간 것은 협상문 자체를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측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 간 것인데, 이는 추가협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것은 추가 협의라고 해야하는 것이지 협상문에 손도 대지 않는 것을 협상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깟 협의 좀 하려고 김종훈이 미국까지 간 것은 국세낭비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짓거리일 뿐이다.

이 젊은 친구는 아마도 서강대녀의 친구이거나 같은 카페에서 활동하는 동료가 분명한 듯한데, 헛소리를 지껄이려면 서울에 가서 한번 지껄여보시지 사람도 없고 준비도 제대로 안된 이런 곳에 와서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나 싶어서 순간적으로 확 열이 올랐다.

사회자가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고 눈치챘는지 그에게서 마이크를 뺏으려 했으나 결국 그는 하고싶은 말을 다 하고 내렸갔다. 이쯤에서 더이상 여기 앉아 있을 이유를 찾기 어려워 일어서버렸다.

바쁜 와중에 힘들게 준비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씀이지만 그렇게 할 거면 차라리 안하는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감은빛

14일인 토요일엔 전날 조금 무리한 탓인지 한낮까지 잠을 잤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어나긴 했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피곤은 전혀 가시지 않은 느낌이었다. 저녁엔 행사가 있어서 나가봐야 했다. 아내는 일이 밀려 있다고 일하러 나가고, 나는 아이랑 잠시 놀아주었다.

아이가 잠든 사이 밀린 집안일을 좀 했다. 그러나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다 하지도 못하고 아이 옆에 누워버렸다. 한참 누웠다가 일어나 대충 집안 정리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했다. 아이를 장모님께 데려다주고 사무실에 들렀다가 행사장에 가야했기에 갈길이 멀었다. 서둘러 준비를 했는데 잠에서 깬 아이가 바지에 실수를 해버렸다. 평소엔 혼자 일어나서 아이 말로 '쉬통'에 가서 바지랑 팬티랑 내리고 잘 하더니, 하필 오늘같이 바쁜날에 딱 바쁠때에 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부랴부랴 옷을 벗기고 엉덩이와 다리를 씻기고 '아기로션'을 발라주고 나들이 옷을 골라 입혔다. 아이는 갈길이 먼 아빠 맘도 몰라주고 계속 투정부리고 칭얼거리고 반항했다.

암튼 서둘러 아이를 차에 태우고 나섰다. 예상보다 한 삼십여분 늦어지긴 했지만 서둘러가면 어떻게 시간에 맞출수도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서울로 향하는 도로가 꽉 막혀있었다. 차는 느릿느릿 움직일 수 밖에 없었고, 시간은 재빨리 흘러갔다. 행사 시작시간에는 죽어도 못 맞추겠다고 생각할 때쯤 도로가 조금씩 열렸다. 서둘러 차를 몰아 일단 처가댁에 차를 세웠다. 주차할 때도 시간을 많이 뺏겼다. 평소 우리가 차를 대놓는 곳에 다른 차가 있어서 전화하고 그 차를 뺄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차를 대놓고 아이를 장모님 품에 안겨드리고 시간을 보니 이미 행사시작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차가 밀리는 걸 알지만 어쩔수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도 잠시 움직이다 멈추기를 반복했고, 마음이 급했던 나는 사무실에서 버스로 두정거장 거리쯤에서 내려서 뛰었다. 숨이 넘어가도록 뛰어서 사무실에 도착하니 행사 시작 시간은 이미 지나있었다. 찬 물을 한잔 마시고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무거운 짐을 들고 다시 움직였다. 차는 막히니까 지하철을 타야했다. 평소 10분이면 걸어가는 지하철역이 왜이리 멀게 느껴지는 지 궁금했다.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지하철을 탔다. 마침내 행사장소에 도착했을때는 행사 시작시간에서 40여분이 지나있었다. 죄송한 마음에 몸둘바를 몰라 구석에 숨죽이고 있었다.

일단 행사를 마치고 나서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움직였다. 나도 그 틈에 끼어 함께 시청광장으로 갔다. 집회는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촛불소녀들이 나눠주는 초를 받아 옆사람에게 불을 빌려 촛불을 밝혔다. 한참 듣고 있으려니 깜짝 손님이 왔다면서 호들갑이었다. 어느 탤런튼지 영화배운지가 나온 모양인데, 티비를 안보는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주위 사람들 말로는 박철민이란 이름의 연기자라는데, 그는 계속 '뒤질랜드'라고 외쳤다. 대충 '죽을래' 뭐 이런 뜻인것 같긴한데 정확한 뉘앙스를 알수없어 조금 답답했다. 잠시 후, 거리행진이 시작되었다. 대다수의 행렬은 명동쪽으로 향했다. 명동에서 종로를 거쳐 광화문으로 돌아오는 행진코스였다. 나는 작가그룹과 동행하여 곧바로 광화문으로 향했다. 오늘도 광화문방향은 차벽으로 꽉 막혀있었다. 워낙 오랫동안 막혀있는 모습만 바라봐서 이젠 저 차벽 너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기억도 안날 지경이다.

작가들은 동아일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나는 차벽앞까지 가서 잠시 서성이다가 돌아와서 그들 사이에 앉았다. 행진 본대는 명동을 걷고 있을 테고, 소수의 사람들은 광화문 사거리를 점령하고 '이명박은 물러나라!'와 '어청수도 물러나라!'를 외쳐대고 있었다. 나는 그닥 할일이 없어 멍하니 작가들의 이런저런 잡담들을 듣고 있었다. 어느 시인이 돈을 걷어 막거리와 안주거리를 사왔다. 나도 일단 한잔을 받아놓고만 있었는데, 한 사람이 내 옆에 자릴 잡고 앉았다.

자신을 시쓰는 윤희상이라고 소개했다. 나도 간단히 내 소개를 했다. 내 밥벌이 수단이 바뀌긴 바뀌었나보다 하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늘 집회를 주최하는 입장에 있었고, 집회장소에선 이런저런 잡다한 실무로 늘 바빴다. 여유가 생겨도 이런저런 단체쪽 활동가들과 구석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을 텐데, 요즘은 집회 주최측이 아닌 시민의 입장에서 계속 집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활동가들이 아닌 작가들과 앉아 있는 모습이다. 참 낯설다!

윤희상 시인께선 다른 작가들과 말씀을 나누지 않고 혼자 막거리를 홀짝 거리더니 옆에 앉은 내게 말을 건넨다. 막걸리가 참 달다는 말씀이셨다. 나는 술을 마실 수 없는 입장에서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후에 또 내게 말을 걸었는데 이번에는 저기 앞쪽에 노점상 연합회 분들을 가르키면서 조금 있으면 저쪽에서 순두부를 나눠주는데 진짜 맛있다고 꼭 가서 먹으라고 하신다. 이번에도 역시 웃으면서 '네' 하고 답했다. 이 분은 그 후로도 계속 내게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다. 잠시 말씀을 나누면서 이분이 꽤 오랫동안 계속 촛불집회에 함께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물대포를 쏘았던 31일 밤이후로 거의 매일 밤새 거리에 남아계시다가 아침해가 뜨면 돌아가곤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중에 다른 작가들에게 들으니 작가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한 얘기라고 했다. 윤희상 시인이 매일같이 나와서 밤새도록 머물다가 아침에 해장국 먹고 돌아간다고.

앞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갑자기 윤희상 시인이 일어서더니 주위 작가들에게 서두르라고 손짓한다. 순두부를 나눠주니 빨리 가서 받아오라는 얘기다. 나는 그닥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이 분이 워낙 권하셔서 받아왔다. 따뜻한 순두부를 한술 뜨니 맛있었다. 거리에서 이렇게 먹으니 더 맛있는 것이리라. 준비해주신 분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이렇게 맛있는 것이리라.

받아온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다시 주위 작가들의 이런저런 얘기들을 듣고 있었다. 조선일보와 함께 일해온 조경란 작가가 한겨레에 글을 한편 실었는데 괜찮은 내용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또다른 누군가가 그럼 조선일보쪽에서 안좋아하겠다고 자연스레 관계를 정리하지 않을까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어떤이는 공지영 작가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다.

다시 윤희상 시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혹시 글 쓰시는 분이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했다. 여기 나를 제외한 대부분은 작가지만 나는 아니라고 했다. 그랬더니 내게 글 쓰기를 권하는 말씀을 하신다. 아마 내가 겸손해서 그러는 것이리라 여기면서 평소에 글을 많이 써보라고 권하신다. 특히 시를 써보라고 하신다. 본인이 시인이라 그런지 계속 시를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시간이 늦어지면서 대부분의 작가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어제 금요일과 달리 오늘은 토요일임에도 별다른 큰 움직임이 없으니 사람들이 일찍 흩어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주위 작가들이 다들 돌아가고 그 자리에는 윤희상 시인과 나만 남았다.

처음 만났음에도 꽤 많은 얘기를 나눴다. 시인은 겸손하고 조용한 성격인 듯 했지만 본인의 생각을 말할때는 아주 단호했다. 그도 내가 그랫듯이 많은 밤을 거리에서 보낸 사람이라 그런지 처음 만났음에도 호감이 갔다. 어느덧 자정이 다 되어가기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집에가서 자고 싶었다. 시인은 헤어질때도 내게 꼭 시를 써보라고 권했다.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피하고 헤어졌다.

또 머지 않은 어느 날 거리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 밤을 그와 함께 지새우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몸은 피곤했지만 가슴이 따뜻한 거리의 시인 한 사람을 알게되어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Posted by 감은빛
어제 13일 효순이 미선이를 기리는 촛불과 고 이병렬님을 기리는 촛불의 의미가 더해진 행사였다. 기사를 찾다보니 잊혀진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지난 88년 6월 6일 사망하신 박래전 열사의 20주기가 얼마전에 지나간 것이다. 사실 박래군 활동가는 주요 현장에서 종종 얼굴 마주치곤 했기에 알고 있었지만 박래전 열사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는데, 박기범 작가가 쓴 동화를 읽고 알게 되었다. 이번에 읽은 기사에 의하면 시인을 꿈꾸었던 박래전 열사가 쓴 시를 모은 유고시집이 얼마전에 나왔다고 한다. 한번 찾아읽어봐야겠다.

암튼 어젠 아내와 아이와 함께 참여했다. 종종 함께 밤늦게까지 남아있으면서 더욱 친해진 사무실 동료 레옹형(늘 화분을 소중히 가꾸는 분이라서 마틸다 없는 레옹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도 함께 갔다. 아내가 어린이 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타고 오고 있었고 중간에 나와 레옹형이 합류하여 함께 시청으로 갔다. 시청역에 내려서 미리 지하철역에서 화장실을 들렀다. 화장실은 늘 그렇듯 긴 줄을 기다려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광장에 나와서 할머니가 파는 김밥을 두줄 샀다. 광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 간신히 빈 공간을 발견하고 자리를 잡은 우리는 우선 김밥과 빵과 물로 배를 채웠다. 노점상 연합회에서 나온 어느 아저씨가 아이에게 바나나 하나를 주셨다. 열심히 배를 채우면서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부르고 자유발언을 들었다.

레옹형은 지금 촛불정국에 대해 르뽀를 준비하고 계시는 팀들로 부터 정보수집을 부탁받고 보수단체들에 대한 정보수집차 먼저 자리를 떴다. 우리 가족은 집회가 끝나고 자리를 깨끗이 정리하고 행진에 참여했다. 늘 그렇듯 짧은 행진은 광화문에서 금방 막혀버렸다. 오늘은 집회 막바지에 박원석 국민대책회의 상황실장이 말했듯이 여의도로 향할 모양이다. 아내와 함께 우린 어쩔 것인지를 짧게 상의했다. 걸어본적이 없으니 얼마나 걸릴지 또 얼마나 힘들지 알수가 없었다. 아이를 데리고 과연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래서 일단 가는데까지 가보자고 했다.

행진 대열이 서대문 방면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옹형이 그 많은 인파(주최측 추산 3만명, 대략 1만5천에서 2만여명 사이쯤으로 생각됨)속에서도 용케 우리를 찾아내서 잠시 함께 있었지만 곧이어 전화를 받으면서 멀어졌다.

역사박물관을 지나고 서대문 고가도로를 오르는데, 촛불의 행렬이 정말 멋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감탄사를 내면서 아름다운 촛불의 행진을 즐겼다. 물론 우리로 인해 꼼짝할 수 없게 된 차에 탄 사람들에게는 그 광경이 지옥보다 더 끔찍했을 것이다.

서대문 고가를 완전히 내려왔을 때쯤 레옹형에게 전화가 왔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으니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아내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해서 육교 앞 스타벅스 건물의 화장실에 가고 나와 아이는 도로에 서 있었다.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행진대열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참 후에 레옹형이 나타났다. 우리 기획위원이자 리얼리스트 100에서 활동하시는 작가분들과 함께였다. 인사를 하고 다시 헤어졌다. 갑자기 아이도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아내가 들어간 화장실에 데려갔다.

우리 식구가 모두 볼일을 마치고 나와보니 이미 도로엔 차가 다니고 있었고 행진 대열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처럼 화장실 등의 볼일 때문에 뒤처졌던 사람들이 열심히 인도로 따라가고 있었다. 이때부터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계속 아이를 안고 왔기에 조금은 팔힘이 빠져있었지만 대열을 따라잡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아내는 내 걸음을 쫓아오기 힘들어서 몇 차례 천천히 가자고 요청했다. 나는 잠시 속도 조절을 이내 마음이 급해져서 다시 발걸음이 빨라졌다.

충정로 역을 지나서 신촌과 마포 방향으로 도로가 갈리는 교차로에서 간신히 대열 꽁무니에 합류 할 수 있었다. 약간 오버페이스를 한 덕분에 약간 지쳐버렸지만 대열에 합류했다는 생각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레옹형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제일 뒤에서 따라간다고 했더니 뒤쪽으로 왔다. 내가 지쳐보였는지 잠시 아이를 안고 가기도 했다. 아이는 이미 여러차례 봤고 오랜시간을 함께 있기도 했기에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안기고 나서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불안한 마음은 남아있나보다.

아이가 무겁기도 하거니와 아이 마음도 편치않은 것 같아서 잠시후에 다시 내가 안았다. 고맙게도 레옹형은 이후에도 한번 더 아이를 안아주었다. 약간 오르막길에서 대열의 속도가 느려졌을때 한동안 아이를 내려서 걸리기도 했다.

한동안 신나서 떠들고 노래도 부르고 주위들 두리번 거리던 녀석은 공덕쯤을 지날때부터 지쳤는지 내 어깨에 머리를 콕 박고서 꼼짝도 안한다. 가끔 고개를 들어서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머리를 박는다. 졸린 눈치다. 이미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대열 뒤쪽에서 가다보니 뒤따라오는 차들이 경적을 울리거나 시비를 거는 경우가 많았다. 아내에게 시비를 건 차량 하나에 경고를 주고 이후에도 여러차레 다른 차들과 시비가 있었다. 마포대교에 올라서니 시원한 강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이미 체력이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는 조금 전에 막 잠이들어버렸다. 잠든 아이는 몸이 축 쳐져서 안고 걷기가 더 불편하다.

주변에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걷는 부부와 아기띠에 아이를 안고 걷는 아빠가 눈에 띄어서 부러웠다. 촛불집회에 올때마다 유모차를 갖고 왔으면 좋았을걸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무거운걸 갖고 먼길을 오는 것 자체가 또 큰 골칫거리다.

아이가 좀 더 어렸으면 유모차나 아기띠에 의지했을테고, 좀 더 컸으면 스스로 걷게 했을텐데 좀 애매한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를 타고 지날때는 몰랐는데 마포대교는 무척 길었다. 잠든 아이를 최대한 편안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걷는데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어느새 레옹형과 또 헤어져버렸다. 여의도에 들어서서 이제 다 왔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걸었다. 여의도 공원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빠져서 공원안으로 들어가기에 아내를 불러 우리도 그 쪽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도로를 통해 도는 길이 아닌 공원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 있을 듯하여 들어갔는데, 내 예감이 맞았다. 우린 KBS 건물 앞에 앉아서 쉬었다.

나중에 전화를 해서 레옹형이 다시 우릴 찾아왔고, 여의도에 계셨던 다른 기획위원이자 작가분들도 몇 분 더 뵙게 되었다. 한참 쉬고 있는데, 행렬은 한나라당사를 향해 다시 출발했다. 아내와 나는 잠시 더 여기서 쉬다가 집으로 가기로 했다. 어느새 12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오늘 기사를 찾다보니 행렬은 한나라당사앞에서 잠시 시위하다가 다시 MBC로 갔고 거기서 시위한 후에 공식 해산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시청쪽으로 돌아갔다는 소식도 있었다. 요즘 촛불시위의 흐름을 보면 그랬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우리가 여의도를 향한 후에 광화문 사거리에 일부가 남아있었는데,(역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경찰에게 밀려 거리를 내주고 인도로 쫓겨나서 집회를 계속했다고 한다.

암튼 우린 여의도 환승센터로 다시 돌아가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심야버스에는 끝없이 사람들이 올라탔다. 버스를 내려 조금 걸어야 했기에 집에 돌아온 시간은 2시가 넘어서 였다. 아이도 아내도 나도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아이와 함께 오지 않았다면 끝까지 함께 할 생각이었는데, 도중에 돌아와서 조금 아쉬웠다. 아내도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아이를 데려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난 그거랑 상관없이 오늘 재밌었다고 괜찮다고 했다. 아이에게도 아내에게도 또 내게도 많은 공부와 운동이 된 하루였다!
Posted by 감은빛
어제 경찰이 컨테이너를 세우고 안에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컨테이너들을 서로 용접하고 도로에 철심을 박아 와이어로 고정시켰다는 기사를 보고 나갔다. 집회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되자 앞쪽으로 가서 컨테이너 바로 앞에 가보았다. 대도심 한가운데에 세워진 컨테이너벽은 그 자체로도 흉물스러웠지만 가까이가서 보니 지저분한 기름이 잔뜩 묻어있었다. 경찰이 컨테이너벽에 '그리스'라는 윤활제를 발라놓았다는 것이다.

이미 1단의 컨테이너에는 많은 시민들이 피켓, 플래카드 등을 붙여놓았다. 특히 컨테이너벽을 '명박산성'이라고 이름붙인 플래카드는 재치있고 멋졌다. 사람들의 키가 닿는 아랫쪽은 모두 피켓들이 붙어있었지만 위쪽은 비어 있어서 여기저기서 받은 피켓 여러개를 펄쩍펄쩍 뛰어가며 위쪽에 모두 붙였다. 윤활제가 발라져 있다더니 기름이 묻은 피켓은 한번에 찰싹찰싹 잘 붙었다.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명박산성'에 다가가자 일부 사람들이 '위험하다! 조심해라!'등을 외치며 막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기름에 불이 옮겨 붙으면 위험할 뿐만 아니라 정부와 경찰 그리고 보수언론에 좋은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보니 이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컨테이너벽에 굳이 기름을 칠한 이유는 뭘까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도록 기름칠을 했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촛불 시위대의 실수로 불이 옮겨 붙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보지 못했지만 경찰은 그 흉물스러운 컨테이너벽에다가 대형 태극기를 두개나 걸어두었다가 나중에 치웠다는 것이다. 그것도 경찰이 직접 걸었으면서도 어느 시민단체가 걸었다면서 거짓말까지 했다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의 기사를 읽고 알게 되었다. 나만 이런 의문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 강양구 기자도 나와 같은 의문을 갖고 기사를 쓴 것이다.

프레시안 해당 기사보기


어제 집회를 시작하면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박원석 상황실장이 정운천 장관이 와서 발언 하려는 걸 말렸다. 그러나 정운천 장관이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정운천이 나타나서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다시 물러났다고 한다.

재협상을 하라는 국민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장관고시까지 강행했던 정운천이 뜬금없이 어제 발언하겠다고 촛불집회 자리에 나타난 이유는 과연 뭘까? 박원석 상황실장의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국민들을 선동하고 폭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더러운 수작이 틀림없다!

경찰도 공무원도 모두 국민의 세금을 받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거늘 지금 모든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더러운 수작이나 걸고 있다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제 국민의 힘으로 모두 몰아내는 일만 남았다!
Posted by 감은빛
대충 하던 일을 중단하고 시청앞으로 나가기 전에 어떤 상황인지 보려고 인터넷을 열어봤더니 여러가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보수단체들의 집회가 열렸고 시민들과의 크고 작은 충돌들이 있다고 하며, 시청, 경복궁, 광화문 등 지하철 역에는 열차가 서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집에는 어떻게 가라는 것인가? 도로를 닭장차로 막는 것으로 모자라서 이젠 지하철까지 막아버리는 것인가?

참 이나라의 경찰이란 조직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국민들을 지켜주라고 월급줬더니 국민들을 두들겨 패고, 국민들의 갈 길을 다 막아버리고 있다. 근데 잠깐 오늘은 차벽이 아니라 컨테이너 박스가 광화문 사거리를 막고 있다고?

뉴스를 클릭해 들어가보니 이건 완전 어이없는 사진이 보인다! 광화문 사거리를 컨테이너 박스로 막아놓았다. 그냥 막은게 아니라 도로에 철심을 박고 와이어를 연결하여 고정했고, 컨테이너들끼리 용접하여 고정시켜놓았다. 컨테이너는 이층으로 쌓여있다. 광화문에만 쌓아놓은 게 아니라 동십자각 안쪽에도 쌓았다고 한다. 현재 청와대는 컨테이너 박스로 완전히 둘러쌓인채 고립된 섬이다!

이명박과 청와대의 일당들은 국민들이 어지간히도 무서운 모양이다! 그동안 광화문에 닭창차 백여대를 빽빽하게 붙여서 막아놓은 것(차 지붕엔 시민들이 오르지 못하도록 벽을 세우고 그 벽에 작은 구멍을 내놓아서 채증용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도 무척 견고했는데, 그정도로는 안심을 못하는지 이젠 아예 컨테이너 박스를 용접해 놓은 것이다! 국민들이 그렇게 무섭다면 이제 그만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될 것을 굳이 이런 흉측한 풍경까지 만들다니 참 한심하기 짝이없다!

자, 이제 나갈 시간이다! 겁많은 쥐새끼를 잡으러 가자!
Posted by 감은빛
요즘 체력이 바닥을 드러낸 채 올라오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한창 사무실 이사를 준비하던 5월 20일경부터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대략 20일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속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무리를 하고 있다! 5월 24일 사무실 이사를 하고 그 다음주에는 짐정리를 하느라 며칠동안 책상앞에 한번 앉아보지도 못하고 늦게까지 일했다. 그리고 금요일인 30일부터 촛불집회에 나갔다. 토요일과 일요일엔 밤새도록 물대포에 맞고, 방패에 찍히고, 경찰에 쫓겨다녔다. 월요일 아침 출근시간까지 시청앞에서 건널목 시위를 하다가 곧바로 사무실에 나와서 일했다.

사무실 일도 많이 바빴다. 이사하느라고 처리못한 일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바쁘게 일하면서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이틀에 한번씩 정도는 계속 촛불집회에 나갔다. 그리고 지난주 목요일과 현충일인 금요일 이틀 연속으로 나가서 밤 늦게까지 있었다. 토요일에는 이사짐을 날라주기로 선약이 되어 있어서 아침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또 이사하러 갔다. 일요일엔 모처럼 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 공원에 나갔다가 비가 와서 서둘러 돌아왔다. 시청에 못 나간 대신 인터넷 중계를 열심히 지켜봤다.

이렇게 강행군을 하는 동안 집안 꼴은 엉망이었다. 아이에게도 평소보다 관심을 갖지 못했다. 아내와 나는 매일매일 완전히 지친 채 집에 들어와서 간신히 발닦고 잠들기 바빴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피곤한 시간들을 보냈다. 온 가족이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다!

이게 다 이명박 너 때문이야! 오늘이 지나면 좀 쉴 수 있을까? 글쎄 아마도 그렇진 않을 것 같은데.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정리하고 나가야겠다! 정말 오늘을 기점으로 뭔가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감은빛

지난 주 토요일에서 일요일 아침까지, 오월의 마지막날에서 유월의 첫째날에 걸쳐 밤을 꼬박 세워가며 시위를 벌였다. 토요일 오후 아내와 아이와 그리고 장모님까지 모시고 참여했던 나는 적당한 시점에서 집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모님께선 집회가 끝날때쯤 돌아가셨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행렬은 인사동쪽에서 일단 막혔으나 사람들은 차벽을 넘어서 경복궁을 향해 나갔다. 동십자각앞에서 경찰과 대치상태에 빠졌을 때, 고민이 들었다. 오늘은 어쩌면 중요한 시점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일단 대치상황이 길어지고 있어서 앞쪽의 대치선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와 상의하여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다가 이대로 별 일이 없을 것 같으면 그냥 돌아가고 혹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 아내와 아이는 근처에 아는 분의 오피스텔에 들어가서 하루밤을 보내고 나는 현장에 계속 남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경찰이 소화기를 뿌려대고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대략 11시반경 동십자각에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경 서울광장에 오기까지 수차례 물대포를 맞았고, 수십차례 밀고 밀리는 몸싸움을 벌였으며, 서너차례 방패와 곤봉을 앞세운 폭력진압을 겪으며 간신히 살아남았다. 과정에서 온몸에 멍이 들고 두 군데 방패에 찍힌 상처가 남았다. 그러나 더 심하게 다치고 끌려간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부끄러웠다. 그들을 구하지 못하고 혼자만 도망쳐나온 자신이 죄를 지은 것 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잠한숨 못잤지만 시청광장을 떠나지 못하고 남은 이들과 함께 이후 일정에 대해 고민했다.

결국 아이에게 밥도 먹여야 하고 집으로 데려가기도 해야해서 잠시 돌아가 쉬다 오기로 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때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차벽에 막혀 있다가 사람들이 차벽을 끌어내자 경찰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차벽 너머에선 살수차가 보이기는 했지만, 이날 하루종일 여론이 악화된 점을 의식해서인지 물대포를 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찰의 폭력진압은 더욱 심해졌다. 한손에 쏙 들어가는 작은 휴대용 소화기를 얼굴에 대고 바로 뿌려대면서 방패와 곤봉과 군홧발로 맨손의 시민들을 마구 두들겨패는 경찰의 모습은 깡패보다 더 무서웠다. 경찰은 더이상 시민들을 보호하는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조직을 갖춘 조직폭력배일 뿐이었다. 게다가 법을 등에 업고 마음대로 시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경찰은 맨손에 각자 구호를 적은 팻말과 촛불만 든 시민들을 폭력시민이라고 매도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시내 주요도로와 인근 골목길까지 차량과 병력으로 완전히 막아서 시민들의 통행권을 침해하는 불법을 저질렀으며, 살수차와 방패와 곤봉의 사용규칙을 어기는 불법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소화기를 안면에 직접 분사하는 불법행위를 남발했다. 게다가 특수한 임무에만 투입되는 경찰특공대가 일반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이에 수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이중에 수십여명은 심각한 부상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유월은 시작되었다. 피와 함께 시작된 역사적인 유월에 어떤 일들이 더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Posted by 감은빛
금요일부터 계속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금요일엔 아이를 장모님께 맡기고 아내와 함께 나섰다. 분위기에 젖어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어서 토요일 새벽 열두시 반쯤까지 있었다. 아이가 감기기운이 있고 열이 나서 장모님께 계속 전화가 왔고 이미 밤이 깊었음에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그냥 택시타고 돌아갔다.

그리고 토요일엔 낮에 대학로로 갔다. 이번에는 아예 장모님을 모시고 아이와 아내와 함께 참여했다. 대학생들이 행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한동안 좁은 인도에 사람들에 치이면서 기다렸더니, 참여연대 안진걸팀장이 방송차에서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을 이끌고 시청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걸어가는중엔 계속 아이를 안고 갔는데, 각종 카메라들이 아이에게 집중되곤 했다. 아이는 많은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는 걸 보고 신이나서 따라했다. 장모님께선 사실 촛불집회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아이랑 같이 있는게 제일 큰 목적이고 촛불집회를 티비에서만 보다가 어떤것인지 실제로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 따라나서신 것 같다. 암튼 행진이 진행되는 동안 다리가 아프시다면 점점 뒤로 쳐졌다. 연세도 많으신데 조금은 고생을 하신 듯해서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시청광장에선 촛불문화제를 보다가 아이가 배고프단 소리에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저녁시간을 훌쩍 지나있었다. 부랴부랴 사람들을 헤치고 뭔가 먹을걸 조달하러 갔는데, 시청광장은 이미 발디딜틈없이 사람들이 꽉 차있어서 움직이는 것 조차 힘들었다. 주변에 식당들이 있을만한 곳을 뒤졌는데, 빨리 조달해갈 수 있는 먹거리가 별로 없었다. 분식집에 김밥 메뉴를 보고 들어갔더니, 김밥 주문이 너무 밀려있어서 더이상 주문을 받을 수 없단다. 여차저차해서 간신히 찐빵과 튀김을 구해서 돌아왔는데, 이번엔 가족이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가는 길이 무슨 정글을 헤쳐가는 것처럼 힘들었다.

장모님께선 돌아가시고 내가 아이를 안고 아내와 함께 행진을 시작했다. 우린 천천히 걸어서 인사동을 통해 경복궁 동십자각까지 갔다. 거기서 차벽과 경찰병력에 막혀 있길래 약간 뒤쪽에 물러나서 상황을 보고 있었다. 11시가 넘어서자 감기기운이 있는 아이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상황이 계속 변화가 없어서 돌아갈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엄마랑 상의하면서 가야지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돌아서기에 약간 미련이 남아서 조금만 더 기다려봤다.

그러던 중 마침내 일이 터졌다. 경찰이 소화기를 뿌리고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상황은 끔찍했는데,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와 아이를 안전한 곳에 보내고 나는 남기로 결정을 내렸다. 마침 광화문쪽에 아내가 잘 아는 분의 오피스텔이 있는데, 그곳에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곳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는 동십자각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지만 난 언제나 그렇듯이 괜찮을거라고 걱정말라고 했다.

돌아오자마자 경복궁 담을 넘어 들어가서 차벽앞으로 나왔다. 사람들과 함께 전경병력과 대치하다가 몇번 밀고 당기고 했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전경들을 확 밀어낼 수 있었다. 과정에서 흥분한 전경들이 방패와 곤봉을 마구 휘둘러 몇 사람이 다쳤다. 암튼 앞쪽 전경들을 밀어내고 나니 시위대 옆과 뒤쪽에 있던 병력들도 밀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이렇게 순순히 병력들을 들여보내주고 나서 나중에 엄청나게 얻어맞겠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계속 더 밀고 들어갔고 우리가 확보한 닭장차 한대에서 안에 연행되어있던 시민들 십여명을 구해내기도 했다. 물대포가 몇 차례 더 물을 뿌리고 여러명이 다쳤다. 많은 사람들이 물에빠진 생쥐꼴이 되어서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나도 팬티까지 몽땅 젖어 버렸다. 다시 전경병력과의 대치가 계속되었다. 나중에 김밥과 빵과 물 등의 먹거리와 일회용 우비 등이 앞으로 전달되었다. 우린 우비를 걸쳐입고 다시 전경들과 방패를 사이에 두고 마주섰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새벽이 오자 경찰병력이 다시 물대포를 쏘고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린 죽음힘을 다해 버텼으나 어느순간 보니 뒤가 텅 비어있고 광화문 방향에서 전경병력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살수차가 여러대 밀고 들어오며 무자비하게 물대포를 퍼붓고 있었다. 삼청동길 좁은 차벽 사이를 사수하던 우리들은 더이상 아무의미가 없이 버려진 꼴이 되어버렸다. 전경들은 방패를 세워 덮쳐왔고 우린 모두 흩어지며 도망쳤다. 몇몇이 집단 구타당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죽어라고 앞을 보고 뛰었다.

잠시후 다시 대열을 가다듬고 광화문방면에서 밀려온 사람들과 함께 스크럼을 짰다. 새롭게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전경들은 우리와 밤새 대치했던 녀석들과는 달리 힘이 펄펄 넘치는 모습으로 방패를 땅에 찍으면서 비웃음와 욕설을 날려댔다. 녀석들이 다가오고 한차례 밀고 밀리는 힘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화액이 분사되면서 갑자기 지휘관인듯한 놈들이 뒤에서 뭐라고 소리를 질르자 녀석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뒷열에서 곤봉들이 휘둘러지고 앞열의 놈들은 방패로 밀어서 거리를 벌린다음 발로 차거나 방패로 찍었다. 순식간에 대열이 허물어지고 대부분 넘어진 후에 방패에 찍히고 밟혔다. 나도 방패에 맞아 넘어졌다가 땅바닥을 한바퀴 구른 다음 일어나서 곧장 도망쳤다.

우리는 안국동방향으로 계속 물러나야 했다. 경찰은 계속 위협적으로 달려들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인사동 입구 가까이까지 밀려난 상태에서 한동안 대치상황이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잠시후 종로방향에서 병력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람들은 그쪽 도로에 화단과 표지판등을 옮겨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지만 어마어마한 숫자의 병력이 밀려오자 별로 소용이 없었다. 양쪽 방향에서 밀고 들어오는 병력은 정말 엄청나게 많았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건 비무장의 시민들을 상대로 경찰이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나중에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5천도 안되는 시민들을 향해 5만이 넘는 경찰 병력이 투입되었다!'고 했다.

새까맣게 개미처럼 밀려오는 경찰들을 보고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정신없이 뒤로 도망쳤다. 멈춰서 막아보자는 말이 통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안국역을 지나서 낙원상가 방향으로 내려와서 종로 거리로 들어섰다. 우리는 다시 구호를 외치면서 광화문 방향으로 나갔다. 그러나 종로 2가쯤에서 밀고 내려오는 경찰 병력이 시민들의 대열을 끊어 놓았다. 이들은 갑자기 달려들면서 닥치는 대로 방패를 휘둘렀다. 인도로 도망친 시민들이 두들겨 맞는 장면이 보였다. 나는 전력질주로 그들을 피해 도망쳤다. 뒤에서 맞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이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은 사람들은 잠시 방향을 의논했다.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이제 겨우 삼십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우린 시청광장으로 발길을 잡았다.

시청광장에서는 먼저 와있던 사람들이 박수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물을 나눠마시고 쉬고 있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삼삼오오 시청광장으로 들어왔다. 그때마다 우리는 박수로 서로를 맞아주었다. 누군가가 빵과 과자와 물을 돌렸다. 한참을 쉬고 있으니 밤새 인터넷 중계를 보다가 날이 밝자마자 나왔다는 사람들이 점점 합류했다. 그들은 물과 김밥과 마른 옷과 수건 등을 가져다 주었다. 서너번 물대포를 맞아서 젖었던 옷은 이미 거의 다 말랐다. 다만 무릎 아래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신발과 양말이 계속 젖어 있어서 발이 퉁퉁 부었다. 바지를 걷어올려보니 무릎부터 정강이에는 수십군데 멍이 들어 있었다. 어깨와 팔에도 온통 멍이 들었고, 오른 팔에는 방패에 찍혀 살짝 찢어진 상처 주위로 피멍이 들고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이렇게되자 이젠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소수지만 밤새워 함께했던 사람들이 아직 여기에 남아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자유발언을 통해 서로를 영웅이라고 불러주고 사랑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아침 9시쯤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가 깼는데, 먹일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어제밤 아이와 아내를 데려다주었던 오피스텔로 갔다. 근처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다. 배는 고팠지만 입맛은 없었다. 억지로 밥을 먹고 몇시간만이라도 쉬어야 한다는 아내의 설득에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오후에 한 네시간쯤 자고 일어나서 저녁을 먹고 다시 집을 나섰다. 청운동 동사무소 앞쪽에서 시민들이 전경과 대치중이라는 소식을 아내가 전했다. 그쪽으로 바로 가려했으나 가는도중 그쪽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소식이 다시 왔다. 시청광장에서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전날 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집회 마무리즈음에 국민대책회의 상황실장이 정리하는 발언을 하면서 한 국회의원이 꼭 발언하고 싶다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참가자들에게 물었다. 누군지 어느당인지 알아야 대답을 할수 있을텐데, 굳이 그렇게 물어보는 걸 보니 민노당이나 진보신당 쪽 사람이 아니고 민주당측 의원이 아닐까 싶었다. 암튼 참가자들의 반응은 시원찮았고, 상황실장은 곧바로 행진 시작을 알렸다.

행진은 서울시의회 앞쪽을 통해서 곧바로 광화문을 향했다. 그러나 광화문에는 이순신장군동상 앞에서 차벽에 막혀있었고 대학생들을 선두로한 행렬은 곧바로 멈췄다. 서대문쪽으로 방향을 바꿨으나 역사박물관 앞쪽에서 차벽이 막고 있었고, 작은 골목들도 모두 차벽으로 막혀있었다. 종로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광화문 앞에 있었다.

시간이 늦어지자 많은 이들이 돌아갔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시민들은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광화문 앞을 막고 있는 닭장차에 밧줄을 연결하고 줄다리기하듯이 많은 이들이 잡아당겨서 차벽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차가 끌려나오자 경찰은 차벽 아래로 소화기를 마구 분사했고 시민들은 대형천막을 펄럭여서 날려보내기도 했다. 틈이 벌어지자 전경들이 앞으로 전진했고 어느순간 덮쳐오기 시작했다. 앞쪽에서 밀고 밀리는 몸싸움에 가담했는데 전경들 중에서 앞열 방패 뒤에 숨어있던 놈들이 갑자기 소화기를 꺼내어 시민들의 얼굴에 대고 뿌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대형이 무너지고 방패를 휘두르며 들어오는 경찰을 피해 사람들은 물러났다. 두어걸음 뒤에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시민들과 전경들은 다시 대치했다. 이때 전경 한놈이 욕설과 함께 방패를 마구 휘두르다가 두어사람에게 방패를 잡혔다. 그 놈을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고 헬멧까지 붙잡힌 그놈은 결국 시위대 사람들에게 끌려들어왔다. 앞쪽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그 놈이 어찌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들은 말로는 방패와 헬멧을 뺏기고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어느 아저씨가 때리려고 했으나 주위사람들이 말려서 맞지는 않았다고 한다. 암튼 그런 상황에서 앞줄의 어느 전경이 '전경 한명 끌려갔어요. 보내주세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수많은 시민들이 끌려가서 이빨이 나가고 뼈가 부러지도록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에서 전경 한명 끌려갔다고 난리치는 녀석에게 어떤 말로 대답해야 할지 좀 난감했다. 뒷사람이 걔는 돌려보냈다고 말했지만 이 녀석은 안믿는 눈치였다.

잠시 후에 녀석들은 다시 밀고 들어왔고 소화기를 얼굴에 곧바로 뿌리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계속 끌려가거나 뒤로 빠져나갔다. 그러면서 계속 대열에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방패를 휘두르며 전진을 계속하는 경찰들. 그러다 왼쪽이 무너졌다며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했고 귀옆을 스치는 방패소리를 들으며 나도 뒤로 뛰었다. 바로 뒤에서 '찍어! 찍어! 죽여버려!'라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우린 계속 뒤로 물러났다가 잠시 대치하기를 반복하면서 서울시의회와 언론재단 사이에서 다시 장기간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경찰 방송차에서 여경이 계속 '불법 어쩌구 저쩌구' 떠들어댔으나 사람들은 '노래해!'를 외치거나 '우~!'하고 야유를 보내어 답했다. '노래를 못하면 시집을 못가요 아 미운사람~' 이란 노래를 불러대며 계속 노래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중에 방송차가 한대 더 왔다. 이 차는 스피커를 위로 올리더니 아주 밝은 라이트를 우리들에게 비췄다. 사람들은 눈이 부셔 괴로워하며 '시력감퇴 학습저하' 등의 구호를 외쳤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3시가 넘은 즈음에 경찰들이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왔다. 나는 고향후배랑 사무실동료랑 같이 팔짱을 끼고 스크럼을 짜고 있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어디 한군데 다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쓰러져서 집단 구타당하고 연행되는건 아닌가 두렵기도 했다. 제일 두려운건 바로 얼굴로 뿌리는 소화기였는데, 한번 맞으면 반항이고 뭐고 하지도 못하고 그냥 죽도록 두들겨 맞고 연행될게 뻔했다. 후배에게 소화기 조심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고 나도 용기를 냈다.

전경들이 밀고 들어오고 잠시 몸싸움이 있었는데, 갑자기 또 왼쪽이 무너졌다. 전경 한 부대가 왼쪽을 뚥고 들어와서 열심히 뒤로 달려갔다. 그러면서 균형이 깨지고 왼쪽에서 부터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되었다. 대열은 깨지고 사람들은 뒤로 도망쳤다. 나도 '빠져나가야돼!'라고 소리를 지르며 뒤로 뛰었다. 왼쪽으로 뚥고 나간 전경들은 뒤에서 덮치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뭔가 이상해서 보았더니 이미 시청방향에서 전경들이 길을 막고 전진하고 있었다. 이젠 완전히 갇혀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인도로 도망쳤다.

밀리고 밀려서 결국 사람들은 차도에서 인도쪽으로 완전히 밀려나고 일부는 골목을 통해 시청광장쪽으로 도망쳤다. 일부는 인도에서 경찰들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나중에 광장쪽으로 가보니 덕수궁 앞과 광장 양쪽에서 파란불이 들어오면 횡단보도를 건너며 구호를 외치는 방식으로 합법적인(경찰기준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와 후배도 몇차례 따라했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계속 하는동안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날이 밝고 6시가 넘어있었다. 사람들은 눈에띄게 줄어있었다. 월요일 아침이라 출근해야 할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갔을 것이다. 밤에 사람들 속에서 반가운 얼굴을 하나 만났는데, 학교 후배였다. 후배는 오마이뉴스 영상기자로 일하고 있는데, 몇 년전부터 한미FTA나 파병국면에서 주요 집회때마다 얼굴을 마주치곤 했다. 언제 술한잔하자고 맨날 말하면서도 한번도 따로 만나지는 못했는데, 이번에 또 만났다. 이 녀석이 아침에 해장국이나 같이 먹자고 하고 헤어졌는데, 여기 건널목 시위현장에서 사다리 위에 서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 씩 웃었다. 한참 촬영하던 녀석은 어디론가 가버렸는데, 편집하러 간 듯했다. 아무래도 같이 해장국먹기는 힘들것 같았다.

6시반이 되자 사람들은 확 줄어들었고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그래도 우린 지치지 않고 열심히 건널목을 건너면서 구호를 외쳤다. 지나는 차량들이 가끔 클랙션으로 손짓으로 지지를 보내주면 무척 힘이 났다. 7시가 되자 나도 출근준비 때문에 나와야 했다.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꾸벅 인사를 하고 후배랑 함께 지하철역으로 갔다.

곧바로 사무실에 들어와서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 앉았다. 집에서 혼자 아이를 깨워서 밥먹여 어린이집에 보낼 아내를 생각하니 미안했다. 피곤하고 온 몸이 아프고 쑤셨다. 다리와 팔을 살펴보니 역시 멍든 곳이 더 늘어나 있었다. 그래도 심하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사무실을 간단히 정리하는데 오른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방패에 찍힌 상처 때문에 힘을 줄수가 없었다. 며칠 지나면 낫겠지만 그 동안 더 많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아무래도 오늘 촛불집회에 또 나가기는 힘들 것같다. 일끝나면 집에가서 자고 다음날 저녁 다시 거리에 나서야겠다!
Posted by 감은빛
지난 토요일인 24일 사무실 이사를 했다. 그래서 지난 주부터 내내 엄청 바쁘고 육체적으로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한창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도 촛불집회 참여가 쉽지 않았다. 마음은 늘 가고 싶었지만 몸은 저녁늦게까지 사무실 정리에 매달려야했다.

하필이면 사무실 이사가 있었던 24일부터 시민들은 촛불집회에 그치지 않고 거리행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제 정운천 장관이 고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어제 밤에는 주최측 추산 5만명이 거리행진에 참여했다. 이 숫자는 이번 주말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우려했던 대로 촛불집회을 주관하는 국민대책회의는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당연한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오히려 이렇게 빨리 그 틀을 깨고 나온 시민들에게 감탄과 감동의 박수를 보낸다. 집회 소식을 제대로 전하는 진보언론들에 의하면 행진시에도 시민들은 국민대책회의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역시 박수를 보낼 일이다.

2년전 한미FTA국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그때는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매우 저조한 상황에서 운동권들 사이에서 좀 더 강경한 소수와 대체로 수동적인 다수간의 상대조차 되지 않는 해프닝으로 끝났었다. 그때 범국본의 지도부는 경찰의 통제선 안에서 간단한 행진을 의례적으로 진행한다음 마무리집회를 갖는 방식으로 이름도 거창한 '범국민대회'를 마무리하곤 했다. 소수의 좀 더 강경한 좌파들은 틀안에서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행진 상황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제대로 된 행진을 해보려고 시도했지만 워낙 소수였기에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집회에 참여하는 절대다수는 운동권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고 이들은 이미 여러차례 국민대책회의에 실망한 후라 이제는 스스로 알아서 결정해나가기를 원한다!

이번 광우병 국면에서 여러번 놀라고 있지만 행진을 해나가면서 행진 참가자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는 얘길 듣고 더더욱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행진 참가자들이 점점 더 늘어났던 가장 최근의 경우는 87년 6월항쟁일 것이다. 나는 그 세대가 아니기에 그런 경험이 전혀없다! 정말 올해 6월에 다시 새로운 민중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끊임없이 저항하고 또 저항해야 한다! 파란 알약을 거부하고 빨간 알약을 먹고 눈을 뜬 지금, 더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다! 이제 갓 백일 남짓 된 이명박 정부와 오늘부터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18대 국회는 아마도 임기내에 온갖 방법으로 민중의 피와 살을 착취할 것이다! 막아내야 한다! 거리로 쏟아져나온 국민들의 진짜 정치를 통해 우리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이제 사무실 정리가 어느정도 마무리 되었으니, 아이를 맡겨놓고 본격적으로 움직여야겠다!
Posted by 감은빛
22일 저녁 촛불집회를 두고 말들이 많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홈페이지를 갔더니 게시판마다 주최측을 비난하는 글들이 넘쳐나고 있다. 비난은 대부분 사회자에 대한 부분과 공연에 대한 부분 그리고 모금에 대한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글들이 부분적인 오해를 갖고 분노를 표현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 몇몇글은 진지하게 불만을 표현하고 더 많은 노력을 부탁하고 있었다.

글쎄, 지금의 상황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데, 촛불문화제 혹은 촛불집회 이 단어 자체에서부터 수많은 오해들을 갖고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집회 경험이 없는 대다수 시민들에 대한 주최측의 과도한 배려(그리고 경찰과의 타협지점 역시 고려된 적절한 수준의 문화제)와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 사이에서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단지 이 상황이 이렇게 갑자기 겪하게 벌어지는 것은 이명박의 헛소리와 사회자의 개념없는 진행이 딱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틀의 촛불집회가 반복되는 것에 국민들이 지겨워질만한 시기가 된 것이 또한 큰 이유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비난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집회 경험이 없는 사람인 것 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그 분노를 그렇게 쏟아낼 수 밖에 없는 그 심정까지도 다 이해한다. 다만 아쉽다. 그렇게 강한 의욕을 가진 행동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딱 거기까지 밖에 미치지 못하는 현재 상황이 무척 아쉽다. 그래 아직은 더 바랄 수는 없는 것이겠지.

지금처럼 많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정치적인 의견을 앞세워 거리로 나서는 경우는 일찌기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소위 좌파라고 불리는 집단들부터 집회라고는 처음 나가보는 평범한 사람들까지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가 높은 것 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까지는 감동스럽지만, 그렇다고 뭔가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너무 오랫동안 권력자들에게 잘 길들여진 운동권들(혹은 좌파들)과 평범한 국민들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섯불리 4.19를 얘기하고 5.18을 얘기하고 6월항쟁을 얘기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8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90년대를 거치면서 정부와 경찰과 언론과 운동권과 국민의 관계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버렸다.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진 이들의 관계는 이제 더이상 과거와 같은 강력한 불꽃이 타오르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작은 불씨들은 얼마든지 많이 생겨도 상관없지만 큰 불꽃은 절대로 피어오르지 못하도록 정부와 경찰과 운동권과 국민이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촛불집회를 주최하는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라는 것은 전국에 있는 크고작은 단체들이 1500여개가 모여서 만든 연대단위이다. 이들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다. 이 정치적 입장이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하기 힘들만큼 이들은 서로 다른 곳에 서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강한 투쟁을 벌여나갈 수 는 없다. 강경투쟁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가진 단체가 분명히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 한미FTA저지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를 들수 있다. 이들은 몇 번이나 대대적인 투쟁을 펼쳤지만 실제로는 큰 불꽃을 피워올리지는 못했다. 과연 못했던 것일까? 이들은 할 수 있었지만 안한것이다. 이때도 전국에서 크고작은 1500여개의 단체들이 모였다. 이들은 적당히 싸우는 척했다. 물론 가끔씩은 진짜 제대로 싸우는 것 처럼 보일만큼 격렬하게 싸워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싸우는 척만했다. 이들은 실제로는 제대로 싸울 생각따위는 없었다.

국민들은 대부분의 경우 집회가 무엇인지 그 본질적인 의미를 모르고 있다. 정부와 경찰과 언론이 말하는 거짓말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정말로 분노할 줄을 모른다. 지금 일시적으로 분노하고 있지만 이건 분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국민들도 역시 진정한 분노를 표출하여 제대로 싸울 의사가 없는 것이다.

집회는 주권을 가진 국민들이 저마다 다양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중요한 행사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만큼 중요한 행사가 또 있을까? 그러므로 집회는 원하는 사람들이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나 경찰이 불법집회라고 말하는 순간 그들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독재자가 되는 것이다. 불법집회라는 말은 그 표현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는 엉터리 말인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에는 불법집회라는 것이 존재한다.(뭐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지) 정부와 경찰은 그 잘난 썩은 입으로 불법집회를 강력하게 진압하겠다고 지껄인다. 그리고 불법적인 폭력을 마구 휘두른다.

경찰이 병력을 대기 시키고 차벽을 세우는 것 부터가 국민들에 대한 폭력의 시작이다. 이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폭력인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회를 여는데 그 주변에 차벽을 세우고 무장한 경찰병력을 수백 수천명 투입한다. 분노할 줄 아는 국민이라면 이 폭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줄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의 집회라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집회신고 따위를 하고 경찰과 협의하에 적당한 수준에서 거리행진을 하는 운동권과 집회장소 주변에 경찰이 세워놓은 차벽과 대기중인 수백 수천의 병력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국민들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건 처음부터 제대로 싸울 생각따윈 없는 권투선수가 관중 앞에서 적당히 싸우는 시늉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당연히 절대로 못이길 선수가 꼭 이겨주길 바라는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다. 안될 걸 뻔히 알면서 '어쩌면'이란 단어를 쉽게 지워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과연 지금의 이 분위기는 저 고착된 틀을 깨고 제대로된 싸움을 할 수 있을까? 가슴이 두근 거리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Posted by 감은빛

어제(14일) 시청광장앞 촛불집회에 다녀왔다. 그전날 밤 아내는 이 나라에서 사는 것 자체가 불안하다고, 뭐하나 마음편히 먹을 수 있는 게 없다고, 이런 사회에 산다는 게 화가 난다고,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이런저런 불평들을 토해냈다. 아이를 재워놓고 우리는 밤 늦게까지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참 오랫만이었다. 서로 바쁜 탓에 최근에는 서로 진지한 얘길 나눠본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제 낮에 아내는 촛불집회에 함께 가자고 문자를 보내왔다. 반가웠다. 사실 저번 촛불집회때 옆에 꼭 우리 아이만한 꼬마가 엄마 아빠 손잡고 와있었는 모습을 보고 나도 가족과 함께오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얼른 답을보내서 가기로 했다.

사회운동하는 사람과 결혼한 탓에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여러 사회문제들에 대해 비교적 잘 아는 편이지만, 아내는 평소에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냥 문제를 인식하고 비판하면서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한두번 크고 작은 문화행사에 함께 참여한 적은 있었지만 정치적 혹은 사회적 문제를 갖고 집회에 함께 간 적은 없었다. 특히 내가 주로 참여했던 집회들은 대부분 아주 위험한 상황이 자주 벌어지기 때문에 맘놓고 함께 데려갈 수도 없었다. 불법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들 덕분에 집회는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와 한미FTA협상저지를 위한 촛불문화제를 매일 준비하기도 했었는데, 나는 주로 실무진행에 구체적인 임무를 받지는 않았고, 전체적으로 진행을 도와주는 정도로 자주 참석했었다. 암튼 그래도 행사주체로서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했었다. 그럴때에도 일로서 참여하는 촛불집회인지라 아내와 함께 참여할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이번 광우병에 대한 촛불집회에는 순수하게 시민으로서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런 입장에 서보는 것이 참 낯설고 신선한 느낌이었다. 암튼 그래서 아이와 아내와 함께 촛불집회에 가기로 했다. 아내가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와서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나오고, 나는 퇴근해서 중간에 합류하여 함께 시청역으로 가기로 했다.

아이와 아내는 소위 '급행'이라 부르는 지하철을 타고 오고 있었고, 나는 신도림역에서 기다렸다가 이 열차를 탔다. 아이는 평소같으면 집에서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인데, 제대로 먹일 것이 없어서 우유와 와플을 먹였다. 급행같지 않은 급행이 용산에 멈추자 우린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시청으로 갔다. 시청 광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행사는 이미 시작되어서 무대위에는 누군가가 열심히 자기 주장을 토해내고 있었다. 우린 뒤쪽에 자리잡고 앉았다. 무대가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을 헤치고 가까이 다가가기는 좀 어려워보여서 그냥 뒤에 앉았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어느새 깜깜해졌다. 여러사람들이 차례로 나와서 저마다 하고싶은 말들을 열심히 하고 내려갔다. 중간에 아이가 쉬가 마렵다고 해서 급하게 시청역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가 앉을 당시에 우린 제일 뒤에 자리잡았는데, 어느새 우리 뒤에 사람들이 많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우린 전체 대열의 중간쯤에 위치한 듯 보였다. 아이는 쉬를 오래 참지 못하므로 열심히 사람들을 헤치고 달렸다.

화장실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약간 초조해졌다. 혹 아이가 바지에 그냥 쉬를 해버릴까봐 계속 조금만 참으라고 얘기해주었다. 다행히 조금 후에 한 칸에서 사람이 나왔다. 나는 재빨리 들어가서 빠른 손놀림으로 아이의 옷을 벗기고 앉혔다.

어제 저녁엔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그럴거라고 미리 예상했기에 아내에게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말해두었고, 아내는 여벌옷이랑 아이를 덮을 작은 이불을 가져왔다. 아이는 그래도 추워보였다. 게다가 9시가 넘으면서 아이는 무척 졸려하고 피곤해했다. 집에 가려면 적어도 한시간은 지하철을 타야하고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야한다.

9시 반이 되기전에 우린 일어섰다. 끝까지 다 보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충분히 재밌었다고 생각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역시 아이는 얼마 가지않아서 잠들었다. 지하철은 많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고, 아내가 노약자석에 앉아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아이가 잠들어버려서 혼자 안고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내가 옆에 앉아 함께 안았다.

잠든 아이를 안고서 집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새 11시가 다되어 있었다. 우린 모두 지쳐서 대충 씻고 이불을 깔고 누웠다. 힘든 하루였다! 하루종일 일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지친 상태에서 아이와 함께 먼길을 다녀왔으니 평소보다 서너배는 더 지친 날이었다.

촛불집회 중에 재수생 한명과 할아버지 한분이 동시에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재수생부터 먼저 발언을 하고 나중에 할아버지가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이 두사람은 모두 무척 조리있게 말을 잘해서 기억에 남았다. 촛불집회에 참여할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요즘 학생들은 참 말을 잘한다! 이 재수생도 정말 말을 잘했다. 그런데 뒤이은 할아버지는 더 멋지게 말씀을 잘 하셨다. 어제 발언자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 바로 이 할아버지였다. 이렇게 멋진 할아버지가 계시기에 지금처럼 멋진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8/05/16 - [삶의 흔적속으로/안야와 함께] - 촛불을 들다
2008/05/14 - [우리사회바로보기] - 노무현에 열광하는 사람들
2008/05/07 - [삶의 흔적속으로/감은빛 하늘아래] - 6일 촛불집회를 다녀오다

Posted by 감은빛

지난 9일 촛불집회(문화제-집회나 문화제나 그 말이 그 말이지만 난 집회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기에 집회라고 표기한다)에서 1부 사회를 맡은 노정렬씨가 역대 대통령 성대모사를 했다. 행사를 진행하면서 발언자들 사이사이에 끼워넣어서 했는데, 1부를 거의 마칠때쯤 노무현과 이명박의 성대모사를 했다. 몇 년전 어느 행사에서 노정렬씨가 역대 대통령 성대모사를 하는 걸 보았는데, 또 보게되니 '저 사람은 저것 밖에 할게 없나?'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 당시에도 식상한 걸 하는 것 치고는 제법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보니 실력이 더 늘어서 제법 그럴듯한 목소리를 들려줬다.

암튼 노정렬씨가 노무현의 성대모사를 할 때였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 바로 옆에 계시던 여성분도 갑자기 촛불을 들어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아우! 너무 보고싶어요!'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요즘 언론에 심심찮게 노무현의 소식이 들린다.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비싼 고향집으로 내려가서 한가로이 지내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퇴임후에 오히려 인기가 아주 좋아졌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어느정도 계산된 연출인 것 같다.

이명박이 취임하자마자 엄청난 뻘짓거리들을 해대고 있는 통에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다시 그리워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리는데, 참 어처구니가 없다. 심지어 광우병이 두려워서 촛불집회에 나온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의 이름에 환호한다니 이건 좀 말이 안된다!

나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첫날 촛불집회에서 한 시민(다함께 소속이라고 밝혔다고 들었다)이 이명박에 대한 비판과 함께 노무현에 대한 비판도 짧게 얘기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고 내려가라고 소리쳤다고 들었다. 그 말을 전해준 사람들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굳이 말할 자리가 아니었다.'라고 평가했다.

글쎄, 나는 오히려 그 사람이 아주 적절한 얘기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누구때문에 시작되었나를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에 대한 비판만을 하고 있지만 정작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결정한 인물은 이명박이 아니라 노무현이었다. 그것도 한미FTA 협상을 시작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공손하게 받아온 것이다.

노무현과 김현종, 김종훈을 비롯한 당시 정권의 고위관료들과 협상단이 지금 광우병 공포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다. 지금이라도 이 인간들에게 책임을 묻지는 못할망정, 노무현에 대해 '보고싶어요!'라고 말하다니, 이건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 당시 미국산 쇠고기를 옹호하는 발언을 수도없이 해댔던 보건복지부 장관 유시민은 말할것도 없고 지금은 이명박에 대해 압박하고 있는 통합민주당측의 수많은 의원들(과거 열린우리당측 의원들)도 당시에는 오히려 미국산 쇠고기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한나라당 의원들과 조중동이 당시에는 오히려 광우병 문제를 들고나와 노무현을 비판했던거랑 서로 입장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그러니 한나라당만 욕할 것이 아니라 민주당도 함께 욕해야 한다. 이명박만 욕할 것이 아니라 욕하려면 노무현부터 먼저 욕해야 할 것이다! 광우병문제에 대해 눈을 떴다면 이제 한미FTA협상, 의료보험 민영화, 수도 민영화, 한반도 대운하 등의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해 눈을 떴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권의 이런 다양한 문제들이 그냥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 노무현 정권때부터 이미 꾸준히 준비되어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008/05/06 - [우리사회바로보기] - 미친소가 몰려온대. 그래서 사람들이 막아야 한대.

Posted by 감은빛
어젠 청계광장 촛불집회에 다녀왔다. 여의도에서도 촛불을 든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뉘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경찰의 으름장 때문인지 참여한 사람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이 적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여의도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전히 학생들의 숫자가 많긴 했지만 동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봤던 앞선 집회들보다 학생들의 참여가 많이 줄어든 것 처럼 느껴졌다.

알고보니 교육청과 일선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온갖 협박과 회유를 한 모양이다. 게다가 지금이 한창 시험기간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참 대단하고 멋지다! 게다가 단상에 올라와서 말하는 우리 학생들을 보면 어쩜 그리들 재치있게 말을 잘하는지 정말 사랑스러운 친구들이다! 암튼 어제 그곳에는 수많은 학교의 '학주(학생주임)'들이 떴다고 한다. 중간쯤에 발언한 수원에서 올라왔다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은 '서울 학생들이 학주가 떠서 다들 가버리고 또 앞에서 자유롭게 말도 못한다'며, '우리는 수원에서 왔기때문에 학주도 안떴고 해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하고 내려갔다.

참가자들의 연령층도 다양했다. 부모와 함께온 어린이부터 흰머리의 어르신들까지 눈에 띄었다. 발언대에 선 사람들도 초등학생부터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많았지만 3~40대 직장인들과 60대 어르신도 계셨다. 정말 순수하게 개인의 자발적인 의지로 참여한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이름 그대로의 자유발언대였다.

이전까지 나는 늘 촛불집회를 준비하는 입장이었는데, 어제 처음으로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촛불집회를 즐겼다.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런 분위기 자체가 워낙 새로운 것이기도 하거니와 내 개인적인 상황의 변화도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약간 기분이 좋았다.

가끔 너무 황당한 주장을 섞어넣은 발언자들이 간혹 있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긴 했지만 그것도 다 사전검열없이 자유롭게 시민들의 주장을 듣는 자리인 만큼 어쩔수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해할 수 있었다.

열띤 발언들과 이름없는 랩퍼의 공연과 대학생 율동패의 공연 그리고 학생들의 텔미 춤까지 어우러져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어서 연기자 정찬과 강기갑 의원의 발언도 있었다. 예전부터 TV를 즐겨보지 않았던 나는 정찬이란 이름을 들으며 누굴까 했는데, 막상 멀리서 얼굴을 보니 한두어번 본적이 있는 연기자였다. 일단 연기자라 그런지 발성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상당히 조리있게 말을 잘 했으며 재치도 있었다. 어느정도 의식이 있는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강기갑의원은 특유의 사투리로 멋진 연설을 하셨다.

생각보다 싸늘한 날씨에 바람이 불어대서 무척 추웠다. 게다가 감기 때문에 고생하는 터라 오래있을 생각은 없었는데, 막상 현장 분위기에 푹 빠져버려서 처음부터 거의 끝날즈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이 나라가 어찌 될 것인지 앞날을 생각하면 머리가 심하게 아프다! 당장 광우병 쇠고기 수입 건도 문제지만 더욱 더 큰 문제는 국회 비준을 앞두고 있는 한미 FTA가 더 큰 문제이고, 이명박이 계속 주장해온 한반도 대운하도 큰 문제다! 거기에 영어몰입교육부터 학원자율화까지 이 정권의 교육정책은 심각한 문제를 불러울 것이 분명하다! 비리로 가득찬 내각과 정권이 앞으로 무슨짓을 얼마나 더 할것인지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그래도 어제 거리에서 만난 우리 학생들은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앞으로 주인공이 될 새로운 세대는 우리들처럼 멍청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사실에 희망을 가져본다!
Posted by 감은빛